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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감미 Aug 25. 2021

본능적 차별 금지

뉴스아님 두번째

한국에 사는 장애인 A씨. 

외국에 사는 한국인 B씨. 

한국에 사는 성소수자 C씨. 

한국에 사는 외국인 D씨.



외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얻어맞은 B씨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같이 화를 내주는 어떤 이가 D씨 보고는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쫓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학교에서 차별을 당한 뒤 하교한 딸 A씨를 감싸주던 어떤 이는 퀴어 축제에서 C씨를 보고 손가락질한다. 도대체 왜 그런단 말인가.



필자는 사람들이 분노하는 불평등에 관한 법적 이슈들이 나올 때마다, 고위 관료직들을 향해 ‘네 자식이 당했어도 그럴 것이냐’, ‘네가 겪었어도 그럴 것이냐’는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비단 고위 관료직뿐만이 아니라 차별과 불평등이 담긴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한쪽은 다른 한쪽에게 <역지사지>를 호소한다. 너 혹은 너의 가족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그렇게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과 믿음이 밑바탕 되어 있는 목소리이다. 하지만 서문에서 예로 든 사례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어떤 차별에 대해 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 다른 차별에서는 오히려 동참하는 경우가 있다. 한 인간이 행하는 타자에 대한 차별의 기저에는 내가 끌어안을 수 있는 세계, 그 바깥에 있는 타인이라는 인식이 있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혹은 ‘같은’ 사람이기에 나 또한 같은 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지만,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차별에서는 나는 절대 겪을 일 없는 정말로 ‘남 얘기’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역지사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을 무슨 수로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단 말인가.



최근 닷페이스 ‘이 질문을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는 이유 | 차별금지법 실패의 연대기’ 영상을 보며 필자는 끊임없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곡된 성경 해석으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거대한 세력 앞에 정치 수명을 위해 무릎 꿇은 정치인들을 보며, 그들 자신의 삶에서 가치 있다고 판단하여 선택한 정치라는 사회적 역할이 공정함과 올바름을 향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지 궁금했다. 몇 년의 걸친 발의에도 심의 단계조차 가지 못한 차별금지법을 보며, 법이라는ㅡ평범한 필자의 손에 닿진 않지만, 필자가 사는 세계의 질서를 지배하는ㅡ것이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소수자가 되는 우리 모두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한 개인으로서 필자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법조차 차별금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한 개인인 필자는 왜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고, 마치 본능인 것처럼 느끼고 외치고 싶어하는 것일까.



바로 나 '자신'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으로 오롯이 살고 싶기에 타인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이기적인 자신이, 남도 이기적일 수 있다는 데에 당연히 공감한다면 이는 실로 이타적이자 인류애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해외에서 차별받지 않고 싶고, 필자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싶은 것처럼, 타인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난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굳이 역지사지를 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와 ‘너’의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오롯이 ‘나’인 상태로 세계 앞에 당당히 마주 서고 싶은 것처럼, 모두도 그러하다. 누군가로 하여금 내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순간, 나 역시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다. 온전히 나인 채로 말이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자신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월? 열등? 왜 그저 단순히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고, 나에게 타자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보지 않는가.”


왜 우리는 지구라는 공간에 인간으로 태어나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분류하고 배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일 것일까. 왜 우리는 지구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조우한 타자를 있는 그대로 환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필자는 너무나도 궁금하다. 혐오, 차별, 폭력, 끊임없는 배제, 결국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그 끝에 다달았을 때, 허울없이 반갑게 부둥켜 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기나 할까. 나는 과연 언제 배제될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순식간에 배제될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발버둥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냥 모두를 끌어안고 나아갈 순 없는 것일까.



여행 중 우연히 들린 서점의 한 동화책에 있던 구절이 떠오른다. 

"자연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알록달록할까? 나를 위해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동물들까지 위하는 걸까?"


우리는 언제까지, 알록달록한 자연을 향한 환상과 호기심을 품고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 자신, 개개인을 위한 알록달록한 세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이 알록달록한 세계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인 채로 남겨둘 순 없는 것일까.



*본 글에서는 필자가 알아본 타인과 타자의 차이를 반영하여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가 필자의 의도가 전달됨에 있어 크게 유의미하지 않으므로 혼용해서 읽으셔도 됩니다.



*추천도서

- 낙인찍힌 몸 (염운옥)

- '장판'에서 푸코 읽기 (박정수)

-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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