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란 게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또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아침 5시 30분, 힘겹게 일으킨 몸뚱이를 강제로 샤워실에 밀어 넣는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침대에 누울 게 뻔하다. 이렇게 살아온 지도 벌써 몇 년이나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이다. 출근 준비를 다 해두고 인스턴트 커피를 유리컵에 대충 탈탈 털어 넣는다. 그리고 이제 막 뜨거워지려 하는 정수기를 만나 컵 끝까지 물을 받는다. 그러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여행을 다니면서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 큰 걱정이 없었다.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뒤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되도 않는 영어 공부를 어떻게든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사에서 제공해 준 기숙사 이른 아침엔 오래된 사찰에서 들려오는 고즈넉한 독경의 소리가 아닌 경박하기 그지없는 어느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같이 출근하는 형이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는 얼른 이어폰을 사용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는 것도 엄청 힘든데 이것저것 신경 쓸게 참 많다. 군대에 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영어 공부가 끝나면 책을 읽는다. 독서는 내 오래된 취미 중에 하나라서 지겹지 않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최소 30권 이상을 읽고 정리했었는데, 귀찮음이 부쩍 커지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마 귀찮음은 술이 늘고 살이 찌는 시기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 작년 12월부터 계획표를 만들어 읽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개 나의 독서는 중구난방이었다. 한 책을 붙잡고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책을 동시에 읽어가는 스타일이었다. 기숙사에서 읽는 책, 집에서 읽는 책, 차에 두고 읽는 책 등등 동시다발적으로 읽어가는 게 나만의 습관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글감이 작은 책의 경우 금방 끝나서 새로운 책으로 이어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읽기가 마무리되었다.
이번엔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으로 한 권씩 읽기로 했다. 대신, 책에 대한 편식을 줄이기로 했다. 대부분 좋아하는 분야 즉, 인문학이나 에세이, 과학 분야의 책을 독파해 나갔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순서를 짜놓는 것이다. 그러면 강제적으로 철학책도 봐야 하고, 아주 지루한 소설도 읽어나가야만 했다. 방법을 조금 바꾸어 보니 한 책에 더 집중되는 기분이 들었다. 속도도 더 나는 것 같고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힘든 아침을 보내고 나면, 7시가 된다.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이 무렵, 같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기숙사 앞에 펼쳐진 예당호에서는 (어림 잡아) 수 만 마리의 철새가 하늘을 뒤덮는다. 마치, 출발선에서 쏘아대는 총소리처럼 그들은 일제히 어떤 신호에 맞춰 힘차게 수면을 발차기한다. 그들의 힘찬 에너지는 물안개가 자욱이 핀 예당호의 안개를 순간 흩어 놓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소리로 서로를 불러가며 진형을 갖춘다. 진형을 갖춘 한 무리의 철새들은 공기의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 맨 앞 대장에게 응원의 소리를 건네며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순식간에 산 너머로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7시만 되면 창문을 연다. 그리고 예당호를 바라본다. 사실 문을 열지 않아도 그들이 가는 것을 청각적으로 알 수 있다. 핸드폰에서 울리는 어떤 알람보다 확실하기 때문이다. 잠시 멍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도 그들의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될 정도니 말이다. 그들의 응원의 소리는 곧 내게도 응원의 소리가 되었다. 그들의 오늘 하루도 어느 생명 못지않게 고단한 하루가 될 것이다. 자연선택된 생존 전략으로 진화가 그런 식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면 조금은 씁쓸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의 오늘 하루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시작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나라고 다를까. 그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공장 노동자의 삶이 그들보다 조금 더 낫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외쳐대는 응원의 소리가 이 비참하기 그지없는 창문 안 어느 실존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워도 과감히 창문을 여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멀리 주차되어 있는 차로 시동 신호를 보낸다. 이제 5분이다. 설정해 둔 시간이 5분이기 때문에, 5분 안에 차로 가야 한다. 서둘러 콘센트를 뽑는다. 그리고 옆방에선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배려 깊은 형이 눈치를 보고 있다. 형과 한 차례 신경전(?)을 벌인 뒤, 방문을 잠그고 새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걸어간다. 조금 옅어진 안개는 해의 기운을 받아 조금 붉어진다. 그리고 이제 막 출발하려는 지각생 철새들의 다급한 소리도 들린다. 그것보다 저 멀리 날아간 새들의 소리가 여전히 희미하게 들린다. 그들의 소리가 들려오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보자는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