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닻 Jan 26. 2024

폭염주의보

닿을 수 없는 목적지처럼 너를 그리워하는 낮이야.


이삼일 간격으로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한반도 가장 더운 해' '연평균 기온 1위' 등의 키워드를 달고 온 여름은 굳이 매체를 통해 전해 듣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온몸의 세포 알알이 비상식적인 더위로 점철되어 곧잘 호흡이 위태로워지곤 했다. 기왕 숨이 막혀 죽을 거라면 한꺼번에 모든 숨구멍을 메워버릴 수 있는 무더위여야 할 텐데. 불행히도 하루하루 천천히 잠식되어 죽어가야 할 날이 족히 120일은 되었. 여름이 여름이라 죽은 사람도 있을까. 경우의 수를 따져보지만 나는 너무 어리고 건강했고, 여름은 수천 년째 여름이었으니 피할 구석은 도무지 없었다.


침이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뜨였다. 땀에 흠씬 젖은 몸을 뒤집어 침대에서 등짝부터 떼어냈다. 머리칼이 눌어붙은 이마를 베개 품에 비비다 텁텁한 단내에 불현듯 꿈 생각이 스친다. 무슨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아스라이 흔들거리니 물결 같기도, 보들보들한 감촉 같으니 커튼일지도. 적어도 머리카락이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금방 잊히는 것을 보니 꿈에 너는 나오지 않았다.


주말이었고, 이른 오전부터 카페 구석자리에 죽치고 앉아 자릿세를 톡톡히 해먹을 요량으로 후줄근한 차림에 모자만 푹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평지를 비척비척 걸었을 뿐인데 얼마 가지 않아 개처럼 혀를 늘어지게 빼고 헐떡여야 했다. 주말마다 들르는-쾌적하지만 아담하고, 음료가 맛있지만 사람이 몰리지 않는 카페는 걸어서 고작 3분 거리에 있었다. 건물 외부 통유리 너머의 사람들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너의 전화를 받았다. 아직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초록불이 성급하게 깜박거렸다. 그 때문인지 너는 다급해 보였다. 어디야.


계획대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기다리는 공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리 애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더위를 피해 달아나는 너의 혼미한 목소리를 붙들어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대뜸 만나자더라, 녹음된 파일이었던 것 마냥 전화는 금세 끊어졌다. 다시 전화하겠다던 너는 그 후로 꼬박 15분 동안 나를 이 뙤약볕에 타 죽어가게 두었다. 정수리에 씨앗을 심었다면 싹이 자랐을 것만 같은 과분한 양의 , 습기와 기름기가 물씬한 바람, 불시에 열렸다 닫히는 호흡, 그리고 오래 침묵하는 전화. 마침내 벨소리가 다시 울렸을 때에는 차라리 집 앞으로 찾아가기 위해 발을 질질 끌던 참이었다.

- 나 좀, 도와줄래.

간곡한 부탁이었다. 너는 최대한 질문처럼 보이지 않게끔 끝말을 늘어뜨렸다. 되려 죽어가고 있던 건 너였던 것일까. 그러나 말마디가 너무도 짧아서 읽어낼 만한 사연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불안이 손마디를 무너뜨릴 것 같아 미끌거리는 휴대폰을 세게 쥐었다. 너는 집으로 와달라더라, 정말 다 죽어가는 말로 미안하다더라. 어차피 너희 집이라면 이 카페보다 아주 조금 더 멀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뛰면 2분.


단숨에 아파트 계단을 두 칸씩 막 오르다 깨달았는데, 나는 어쩌다 보니 너의 집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었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신발이 하나도 없는, 그렇다고 신발을 모두 정리해서 넣을 신발장도 없는 좁은 현관에 어디서 누가 묻혀 왔는지 모를 물기만 가득했다. 요 며칠 비 내린 일도 없었는데. 물 자국은 실내까지 이어졌다. 열기로 득실득실한 집 안은 바깥과 다름없이 후끈거렸다. 거실 한가운데 네가 흥건히 젖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네 이름조차 부를 생각을 잊고 달려가 너를 들쳐 안았다. 품 안에 미지근하고 찐득찐득한 네가 안겼다. 너는 눈꺼풀을 이기고 나를 올려다본다. 흰자가 넓고 동공은 뭉그러져 있다. 너는 힘들여 웃더니만, 대뜸 손가락을 찬찬히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 나, 녹고 있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은 네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녹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손끝을 따라, 천장 한구석에 달린 에어컨을 보았다.     

- 봐, 정말이야. 그러니까 에어컨 좀 틀어줘.

자세히 들여다보니 너는 정말 녹고 있었다. 이미 귓불 아래까지 끊긴 머리카락을, 모호해진 손가락 마디마디의 경계를, 심하게는 뼈가 드러나기 직전까지 얇아진 반투명한 무릎의 피부를 아연히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리모컨을 찾았다. 이미 한차례 잡동사니들이 흐트러진 곳에 리모컨도 나동그라져 있었다.


나는 곧바로 가장 낮은 온도를 설정하고 에어컨 날을 눕혀 바람이 네 쪽으로 향하게 두었다. 다시 품에 너를 바르게 누이고 18도라기엔 지나치게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순식간에 겨울인 듯했다. 금방이라도 서리가 맺힐 것처럼, 이마에 방울방울 소름이 돋았다. 한참 간 너를 끌어안고 있었다. 너는 순식간에 온기를 빼앗겨버린 내 몸과 다르게 너무도 천천히 식어서, 나는 내 찬 몸으로 너를 오래 꽉 끌어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이 식어 맺히는 품 안에서 간신히 미적지근해진 네가 한숨 돌린 듯 푹 웃음 지었다. 거짓말처럼 점차 녹는 정도가 줄고 있었다.


-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너는 살짝 콧등을 찡그린다. 피부가 흐물거려서 주름진 곳이 다시 편편해지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 올해 유난히 덥다 했지.


- 그렇지만 난 여태껏 한 번도 네가 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 아주 천천히 녹았었거든, 그동안은.


그게 그렇게도 별일 아닌 것처럼 너는 짤막하게 웅얼거린다. 언제부터 그래왔다는 거야? 내가 언제부터 네가 녹아가는 걸 몰랐다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녹다가, 다 녹아버리면 어떻게 되는 건데? 만약 네가 전화를 걸지 못했으면? 만약 내가 오지 않았으면?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어서, 너를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네가 삽시간에 녹아 사라져 버리는 것을 참담히 목격하기라도 했다면?


- 죽으면 그만이었어. 올해 여름이 마지막이었던 거야. 이것도 잠시 멈추는 것뿐이니까…


내 불안과 공포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네가 나에게 그렇게 별것도 아니라는 듯, 너는 내가 정말로 너 죽어가는 걸 지켜보아도 무탈했으리라 여기는 듯, 그런 거니. 여전히 살아 돌아온 사람보단 죽어가는 사람에 가까운 말투가 못내 거슬렸다. 웃어 보이지 못하는 솔직한 얼굴이 자꾸만 뒤틀리었다. 그새 얼기라도 한 것처럼 안면 근육의 움직임은 찌뿌둥했다. 너는 침착하게 말을 멈췄다가, 웅덩이진 바닥에서 녹다 만 손을 건져 올려 나를 창백하게 어루만졌다. 이제 우리 둘 다의 표면이 모두 차가웠다.


- 그런데 갑자기 네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대체 무슨 말이 그래, 대꾸하지 못한 그 순간에 고작 18도의 에어컨 바람이 숨 막히게 뜨거운 여름을 송두리째 얼려 놓고 있었다. 놀랍게도, 완벽하게도. 그래서 나는 충동적으로 너를 더욱 힘주어 안아 품에 완전히 묻어버렸고, 그래 네가 녹아 없어져도 괜찮을 거란 힘없는 생각을 했다. 대신 나 또한 네 옆에서, 이 서슬 퍼런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죽게 해 준다면. 방식은 다르더라도 비슷한 속도였으면 한다. 누가 먼저 사라져도 너무 서글프지 않도록.

 

결국 네가 녹기를 그친 다음에도 종일 너를 안고 있던 그날 하루 동안은, 여름인 줄도 몰랐다.


결국은 이 사막에서 죽는 꿈을 보았어
눈물을 자아내어 오아시스를 만드는 것이
아마 더 쉬운 일일 거라고
지난 어느 밤에 묻힌 너는 말했지
•••
닿을 수 없는 목적지처럼 너를 그리워하는 낮이야
- 이닻, 모험 中
이전 02화 흰나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