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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Jan 29. 2024

달리기

끝내 나는 너의 곁가지도 될 수 없음이야.


땡볕의 운동장을 보면 너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너는 내가 너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줄곧 달리기로는 전교권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 체육대회는 독특하게도 계주 경기가 따로 없는 대신 개인 400m 달리기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민망할 정도로 짧은 길이의 기능성 반바지를 즐겨 입고 '육상특화학교!'를 구호처럼 외치던 괴짜 체육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대회 일정이 잡히고 각 반에서 선수가 선발되기 시작하면, 대개 다른 반 아이들은 애당초 2등 자리를 놓고 기싸움을 했다. 비워둔 1등 자리는 이미 끊어놓은 결승선처럼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너의 차지였다. 대회 당일에도 2등 선수와 반 바퀴가 넘도록 앞서 나간 너에게는 어떤 응원도, 심지어 장난스러운 야유조차 없는 일이 다반사였다.


네 허리가 채 닿기도 전에 결승선을 놓아버리곤 해서, 너는 볼품없이 고꾸라지는 그것을 네 손으로 주섬주섬 치우고는 형식적으로 건네지는 생수를 말없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소감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았다. 1등 도장이 손등에 퍼렇게 찍혔지만 너는 하나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너는 늘 열심이었다. 날씨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체육 수업을 앞둔 쉬는 시간에는 꼭 남들보다 빨리 운동장에 나와 네 바퀴를 내리 돌며 몸을 풀곤 했다. 가끔 날이 화창하면 화창한 대로, 흐리다 싶으면 그 좋은 대로, 좋고 나쁜 그 어떤 요소든 핑계 삼아 수시로 밖에 나갔다.


달리기에 부지런할수록 너는 또래에 비해 다리도 더 길어지고 발도 더 크고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한날에는, 평소처럼 네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로 뻗치는 머리카락이 많이 긴 것을 보았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달리면서 너는 자랐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커가는 중에도  같은 속도로 운동장을 달렸고, 꼭 반 바퀴를 약간 넘는 정도의 간격을 두고 1등이 되었다. 어쩌면 그저 훈련이었던 것이 아니라 너는 단지 그 달리는 일 자체를 사랑했는지도 몰랐다.

- 있잖아, 나 이제 달리지 않을 거야.

네가 돌연 선언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었다. 체육대회를 한 달 앞둔 어느 날. 먼저 말을 꺼내기에 , 하고 이유를 물었을 뿐인데 너는 단숨에 사색이 되어서는, 입속에 은밀히 감춰두었던 비밀을 바스락거리며 펼쳐 보였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네가 그날 아침 고백을 받았다는 것과, 그 아이가 네 달리는 모습에 반해 내내 지켜봐 왔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 라고 반문하전에는 그 아이가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들었나-하고 어림짐작했지만, 너는 내 속을 읽은 것처럼 곧장 도리질을 쳤다.

- 아무튼, 더 이상 달리면 안 돼. 너는 기억하고 있어줘야 해.

마치 저는 그 다짐을 잊어버리고 다시 달려 나갈 것이 분명하다는 듯, 그래서 제 자신에게 단단히 당부하는 것을 나에게 대신 전가하듯, 혼잣말하곤 멀어지는 너에게 무어라 다른 반응을 해줬어야 했나 싶어 괜히 겸연쩍어졌다. 실은  뜻 없다 생각했던 것 같다. 나 또한 달리지 않는 네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웠으니까.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체육 시간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말간 얼굴에는 빽빽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데 무릎이 자꾸 바지에 걸려 바보처럼 비틀거렸다. 창문에 기대다시피 붙어 흘긋 밖을 내다보았다. 너는 없었다. 초등학교는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 가장자리 붉은 트랙이 둘러져 있는 형태였는데, 여기 운동장은 그냥 생판 모래밭이었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속도로 그 둘레를 달리고 있어야 할 네가 없을 뿐인데, 운동장은 아무도 어떻게도 사용할 수 없는 척박한 황무지 같았다. 그제야 의문이었다. 너는 왜 달리면 안 된다고 단언했을까.


다음 달 5월에 있었던 체육대회 날까지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너는 자주 넋을 빼어다가 창밖으로 던지며 무기력한 뒷모습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약속대로 네가 달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끈질기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네가 이미 여러 차례 눈으로 그 운동장을 수백 바퀴쯤 더 돌고 있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간절해 보이는 네가 나는 조금 아팠다. 너를 트랙 바깥에 가두어 놓은 미상의 이유가 못내 미웠다.


그러나 결국 너의 이유, 그 진짜 비밀은 그날을 다 넘어가기 전에 밝혀졌다. 나는 네가 혼자 앉아 있던 스탠드 맨 윗줄에서 두 칸 더 아래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같이 앉아있지 않은 모습은 우리 둘 모두에게 제법 어색한 일이었지만, 굳이 그렇게 떨어져 있었어야 할 만치 소원한 공기가 그날에는 존재했다. 그 틈을 비집고 어떤 낯선 얼굴의 아이가 너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너와 그 아이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 요즘은 왜 달리지를 않았어? 나, 너를 볼 수 없어서 며칠 새 되게 우울했어.


-아… 미안, 다리에 문제가 좀 생겨서.

너는 대놓고 비밀을 만들지언정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애가 아니었다. 나에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을 테지만 딱히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쩌면 네가 이제야 털어놓을 심산임어렴풋이 알았다.

- 정말? 그런데 오늘 계주 뛰어도 괜찮은 거야?


- 노력해 볼게.

거짓말.

너는 푸스스, 흩날리는 풀잎처럼 웃었지만 그것은 철저히 거짓이었다. 잔뜩 부서진 웃음의 파편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뒤통수에 속속들이 박혔다. 그 아이가 자리로 돌아가자, 네가 아무렇지 않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려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모른 척 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 또한 그런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만큼 너도 나를 잘 아는 애였다.

- 그거 알아? 너무 많이 사랑받으면, 죽어.

네가 한마디 떼자마자, 휘슬 소리가 매섭게 귓가를 찢었다. 어느새 계주전이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너는 달려야 하잖아, 이제 어쩔 거야. 나는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너를 본능적으로 막을 뻔했다.

- 누군가 자꾸 바라보는 건 안 좋은 일이야.

다리를 털어내며 말을 잇는 너, 그렇지만 어차피 갈 거잖아. 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신경하고 가벼운 몸짓으로 달려 내려가는 너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하려던 말이 이렇게 끝일 리 없었다. 계주가 시작되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수 소개가 이어지고, 휘슬이 두어 번 더 울리고, 들뜬 관중석이 들썩였다. 너는 발끝을 땅에 세우고, 발목을 둥글게 굴리고, 다리를 옆으로 쭉 뻗으며 주저앉고, 이번에는 발끝을 손으로 잡아당기고……


잠시 보고 있던 것을 잊었다. 그러다 불현듯, 사방이 쥐 죽은 듯 잠잠해진 지점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정적쏟아지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끌려간 곳에는, 너무나도 눈에 띄게 네가 있었다. 너는 당연하게도 가장 빠르게 스퍼트를 내야 할 마지막 주자였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건 사뿐사뿐 걷고 있는 너였다. 머리카락 한 올 날리지 않는, 아주 더디고 더딘 속도로 걷고 있는 너. 트랙 대신 임시로 그어놓은 하얀 선 안쪽으로 충실히 걷고 있는 너를 보았다.


숨죽인 무리 가운데서 속닥이는 소리가 기포처럼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앞쪽에서 결승선이 끊어졌, 모든 불균형한 침묵들이 단번에 박살 나 흩어지면서 너는 다시 잊혔다. 거센 환호의 물결이 휘날리며 네 머리카락을 거칠게 제치는 와중에도 너는 계속해서 또박또박, 걷기만 했다. 다른 주자들과 합의가 된 부분인지 알 수 없지만, 명확한 기권패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크나큰 실망과 당황스러움이 쨍하게 내리쬐었다. 그 아이네가 왜 달리지 않았는지 영영 모를 것이었다. 너는 결승선이 무심히 버려진 자리까지 변함없는 속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걸어갔다. 생수병이 들이밀어지자 살짝 웃는 것도 같았다.


역시 너는 그 아이를 지독히도 싫어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랑받으면 죽는다니, 그런 말까지 면서. 자리로 돌아온 너에게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첫 꼴찌를 축하해 주자 너는 소리 내어 웃었다.

- 축하할 일이야?

- 기분 좋아 보여서.


- 사실 맞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거든.

잔잔하게 말하는 너의 붉은 얼굴은 정말이지 생기가 넘쳤다. 말도 안 되는 것 투성이었고, 나는 여전히 네 말들 중 무엇 하나 제대로 소화한 것이 없었지만-그래도 잠시는, 내가 그 누구보다 먼저 달리는 너를 사랑했었노라고 백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말마따나 누구 때문에든 죽지 않고 살아서 참 다행이라고. 물론 믿지는 않지만, 그 말들. 네가 여태껏 살아있음으로 말이 되지 않는 논리였기에. 

- 이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낫다고? 확실해?

- 걸어야 할 길이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오늘 해가 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면, 천천히 걷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겠지. 일사병으로 쓰러졌을지도 몰라.

- 그러니까… 그래도 사랑받아서 죽는 보단 낫다는 ?

집요하게 물었지만 너는 핀잔도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한적한 하늘을 가만 응시하기만 했다. 네가 나를 바라보지 않으니 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애타는 일은 오로지 내 몫인데, 네 말은 이러다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잖니. 내가 이리도 쉽게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거잖니.

- 너무 많이 사랑받으면, 분명히 죽는데 말이야. 사랑받는 동안에는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른다는 게 무서운 거야.

가장 해괴한 답변이 돌아오는데, 나는 왜인지 땡볕의 운동장을 네 바퀴쯤 돌고 온 것처럼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럼 사랑하는 동안에는 내가 그를 죽이는 줄도 모르겠구나. 그 말이 더 무섭지 않니. 너에게 그런 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심장이 김 나는 더운 숨을 자꾸 퍼올려, 이 이상 너에게 휘말리면 이번에는 달리지도 않은 내가 필시 혼절할 것 같아서.

나는 갑자기 네가 하늘만 보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가 올수록 이 마음은 올올히 풀어져 진흙이 되고
그러나 너는 나를 가까이 앓은 적 없으므로
그 질펀한 데 미끄러져 넘어질 만큼의 접점도
내어주지 않겠지
끝내 나는 너의 곁가지도 될 수 없음이야
- 이닻,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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