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빨강머리 앤은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실망하지 않는 것보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더 나빠요!
매일 아이들과 함께 사는 나에게도 비슷한 신념이 있다.
"아이들은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은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좋은 것을 보고 예쁜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라야 한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2에서 점점 사춘기 소녀가 되어가는 라일리의 기쁨이는 이렇게 절망한다.
어른이 된다는건 기쁨이 줄어드는 일인가봐
라일리에게 쉴새없이 일어나는
불안하고, 따분하고, 질투나고, 당황스러운 일들은
마치 기쁨의 절대량이 줄어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니까.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집 사춘기 아이들과 함께 이 그림이 떠올랐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반된 마음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증오할 수 있고
존경하면서도 경멸할 수 있으며
친밀하면서도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상반된 마음들이 매우 균형잡힌 크기와 구도와 색깔로 자리잡고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안정적이며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된다는건
불편할지 모르는 이 모든 감정들이
똑같이 중요한 크기를 갖는다는걸
알아가는 일인 것 같아.
.
나도 아직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고
마음은 여전히 이렇게 제멋대로다
어떤 분노들은 제때 알아채지 못해
이렇게 점점 커지기도 하고
이성의 뇌로 무수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점점 과감해지고 사나워진 마음들이
스프링처럼 튕겨나올 것만 같을 때도 있다
제법 어른스러운 척 하는 내가
저편에 웅크린 어린 나에게 묻는다.
정말 네 모든 감정들을
동등한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어?
어린 시절 어디쯤에선가 이해받고 이해하길 멈춰버린 내 감정들이 답한다.
여전히 나는 해피엔딩을 꿈꾸고,
기쁨으로 가득하길 바라
나는 아직 용기가 없다.
인사이드아웃2 마지막 장면
폭주하던 불안이와 5개의 감정들이
라일리의 핵심 기억들을 둘러싸고 지켜주는 장면에선
당황스럽게도 오열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모든게 너야!
라고 위로해주는 그 장면을 나도 오랫동안 꿈꾸고 있었나보다.
이제 행복에 대한 오랜 집착을 버려야할 때가 되었다면
멈춰버린 어린시절 어디쯤에서 걸어나와야 한다면
정호승 시인과 같은 용기를 내고 싶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중략)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남탓은 그만하고
누가 감히 내 마음을 쥐고 흔들도록 내버려두지말고
슬픔을 수여받는 저 당당한 말투처럼
내 마음의 주인이 되고 싶다.
외눈박이 괴물조차 이렇게 고운 시선으로 그려낸 화가 오딜롱 르동(1840-1916)
인생 대부분이 어둠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그가
인생 말년에 그려낸 이 신비로운 그림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