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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윰 Jul 26. 2023

스물여덟에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네

 

아무도 읽지 않더라도 시리즈물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글을 쓸 때면 내심 이걸로 잘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오늘은 없다.
아주 진솔한 이야기여서다. 내 이야기다. 나는 사실 요절하고 싶었다. 
서른을 넘긴다는 건 내 계획에 없었는데 죽지 못해 살아 있다.
죽지 못한 이유를 붙인다면야 내가 회, 육회, 사시미, 뭉티기 같은
날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될 거다. 사후세계엔 그런 게 없으니까.
죽은 자들의 세상에 날 것이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우스갯소리 같은 이유가 아니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이날 이때까지 '살아남는 것'을 견디기 위해서
달리고 달려온 어느, 평범한 서른 두 살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교복 입었던 시절이 좋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 걱정 없던 미취학 아동 시절이 좋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대학교 캠퍼스 시절만한 때가 없다고 한다. 또 누군가에겐 사회초년생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언제로 시간을 돌리고 싶느냐고 하면 다양한 답변이 나올 거다. 근데 내게 누군가가 솔직히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거 같다. "태어나기 이전으로."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어린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지리멸렬하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매일의 일상이, 눈을 뜨고 무언가를 하고 다시 잠들었다가 화창한 아침을 맞이하는 평범함이 싫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게 지겨웠다. 산다는 건 노력이었으니까. 


공허한 마음 안에 '무언가' 채워야 살 수 있어서였을까.


어린시절부터 나는 <1등>이 목표였다. 1등이 되면 많은 게 쉬웠다. 부모님이 행복해했고, 딱히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붙었으며, 나에게 '미래'도 보장되는 길이었다. 또한, 나 역시 '잠깐'은 흡족했다. 1등이라는 게, 잘 하는 사람이라는 감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줘서.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건 맞는데, 대체 언제까지 이 삶을 영위해야하는지 지긋지긋했다. 재미가 없었다. 물론, 사소한 재미는 자주 느꼈다. 음식이 맛있거나, 하늘이 맑고 화창하거나, 꽃이 예쁘거나, 옷 프린트가 예뻤을 때 금새 기분 좋아졌다. 사소한 것에 남들보다 즐거워하기 쉽다는 말은 사소한 것에 남들보다 화가 나거나 실망하거나, 지치기 쉽다는 의미기도 했다. 


나는 예민하고 민감했으나, 그것을 별로 티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어쨋거나 첫째였고 동생이 둘이나 딸려 있었으며 그렇게 부유한 집은 아니었지만 아쉬움을 느끼지 않도록 부모님이 노력하는 집이었다. 그말인 즉, 부모의 희생을 바탕으로 내가 먹고 살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내 밥벌이 정도는 잘 해내야 한다는, 추후에 부모님은 물론 동생까지 잘 챙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현재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 그저 내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 벅차는 실정이며, 어쨋거나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살아온 지금의 삶에서 그다지 찬란한 미래도 없다. 살아 있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어린이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어쩌면 오래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명제를 감당하며 지금까지 지리멸렬하게 살아 있는 셈이다. 


이정도면 왜 죽지 못했냐 물을 수도 있겠다. 솔직히 단순하다. 스스로 죽는다는 것에는 많은 계산과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실제적으로 여러 방도를 찾아본 적도 있다. 울증이 극에 달했던, (사실상 울증이라 말하기도 애매한 게 그냥 암것도 하기 싫었다, 우울하고 눈물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먼지가 되고 싶었던 시절) 때에는 한번 찾아보고 구체적으로 계획도 나름 세웠었다.  결국 실천에 옮기진 못했지만... 어쩐지 패배자로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1등과 선두만을 좇던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던 끝에 나가 떨어져서 공부로 <대의>를 이루지도 못하고 그저그런 글쟁이가 되었다. 스물여덟 이전에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를 못해서 그저 그렇게 밥벌이하며 살고 있다. 지금 이모양 이꼴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참 열심히도 살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야 해서 <단거리 달리기>에 능했다. 원하던 대학 문창과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빠르게 취직했고, 이력서에 칸이 모자랄 만큼 회사 일과 프리랜서 외주 일을 병행하는 와중에 글도 썼다. 책이라 부르기에도 살짝 뭣하지만 책 1권도 나왔다. 


스펙으로 따진다면 모자란 스펙은 아니나, 성공했다고 말하기엔 많이 모자라다. 그저그냥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월급이긴 하나, 미래는 불투명하다. 나는 그저 이렇게 내 밥그릇 챙기는 정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 남아서 새벽까지 일을 했었나 자괴감이 든다. 


나는 이상이나 랜디로즈와 같이 요절한 천재를 부러워했다. 좀 더 정확히는 요절을 부러워했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반짝이는 그들의 천재성을 부러워했다. 나는 천재도 아니며, 요절도 못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겐 모르겠지만 나에겐 크다. 


나는 더 이상 1등이 아니고, 천재도 아니며, 요절도 못한... 사실상 왜 살아 있지? 싶은 삼십대 초반이니까. 회와 날 것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죽고 나면 이걸 못 먹잖아! 하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지만 사실상 그걸 먹건 못 먹건 상관이 없다. 


스스로 죽기에 나는 결단력이 부족했다. 또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이란 건 필연적으로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다. 명대로 살다 죽는 것도 산 자에게 내 몸뚱아리를 치워달라는 민폐를 끼치는 것이니까. (그것은 명줄이 끝났다라는 방패라도 있지 그 전의 것은 아니잖아랄까) 과단성 역시 없었다. 죽음을 향한 결단력이 없었단 의미기도 하겠다. 


또한, 어려서부터 지긋지긋하고 지리멸렬한 삶으로 내가 왜 던져진 건지 궁금해서 각종 책이나 이야기들을 찾아보다보니 줏어들은 게 너무도 많았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면 지박령이 돼서 그 장소를 못 벗어난다거나 뭐 그런 거... 이승이 싫어서 그렇게 갔는데도 못 벗어난다는 건 상당히 끔찍하다. 


지병도 없고, 대신 골골거리고 잔병치레는 많이 한다. 즉, 병원 갈 일이 많고 병원비가 무수하게 끝없이 깨진다는 의미다. 최근에도 사마귀가 도져서 돈이 계속 내 밑으로 들어가고 있어서 지긋지긋하다. 숨쉬고 살아간다는 값이 얼마나 묵직한지. 눈 뜨고 숨을 쉰다는 이유만으로 월세와 공과금, 식비 그리고 병원비, 교통비와 기타 등등이 무수하게 깨진다. 이 모든 게 '생명세'다. 단 한번도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뭐 이렇게 투정부리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글쎄...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거 같다. 평상시에는 이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빠르다. 대학 졸업 이후 나는 방송국에서 광고대행사를 거치며 빡센 환경에서만 일했고, 남들의 배 이상을 일해서 뒤치닥거리 담당이었으며, 병을 얻어 회사를 그만뒀다. (죽을 병은 아니었단 게 문제나 그 순간에는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일을 할 수조차 없을 만큼 몸을 갈았다... 조금 더 버텨서 죽었어야 했는데 의지박약이다) 


회사란 곳은 그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곳이었다. 내가 뒤치닥거리 해주던 사람들은 오래 버텼고 나보다 더 잘 벌었으니까. 회사란 곳은 심지어 자리에 앉아 자도 자르지 않는 따듯한 곳이었다. (실제로 출근해서 기면증 걸린 것처럼 자는 사람 있었음, 의외로 곳곳에 많다고) 근데 뭐, 몸이 바쁠 땐 생각도 단순해진다고 그렇게 빡세게 일하는 동안에는 왜 살아 있느냐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내가 자초한 일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때보단 환경이 낫고, 모자란 사람들은 더 많다. 모자람을 버티며 꾸역꾸역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은 다른 곳을 가봐야 별달리 나아질 게 없다는 생각에서다. 희망이 없다고 해야하나. 회사는 다 똑같다. 월급은 쥐꼬리 만하며, 내가 열심히 프로젝트를 이행하고 성과를 거둬봤자 내게 떨어지는 건 없다. 언제나 소모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내가 회사 밖에서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힘이 딸린다. 


살아 있다는 걸 감당하는 데도 참 많은 에너지가 든다. 나는 내심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웃기지 않나? 스스로 죽을 결단성은 없으면서 또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한다는 게 진저리가 난다. 1등이 아닌 상태로, 그저 그런 사람으로 그저 그렇게 계산기 두드려대며 전전긍긍하며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어서 살아가는 일상을 버티기 위해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나 지긋지긋하다. 


나는 어째서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걸까. 

솔직히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 내게 죽음을 선택할 버튼이 주어진다면 모은 돈을 다 털어서 가족에게 줄 거다. 그리고 하루 정도 바다를 보고 거기서 버튼을 누를 거다. 그럴 수만 있다면 미래를 대비할 이유도, 필요도, 책무도 없으니까.  


일생 나는 살아 있음을 감당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든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1등이 되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뭐든 내게 감투를 씌웠다. 그 결과, 나는 단거리 달리기엔 능하나 장거리 달리기엔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분출하듯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 모아 하나를 성취하는 것은 익숙하고 잘 하는 일이다. 딱 거기까지 감내할 수 있어서다. 


어쨋거나 살아 있다. 


너무 싫고 지긋지긋하고 지리멸렬한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르겠다. 서른이 넘어버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 외에 인생에서 명확한 일이란 없다. 심지어 죽음에 있어서도 이후에 뭐가 펼쳐질지, 내 죽음이 언제, 어느때,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올 지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미지를 뚫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일평생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내 한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에 그치기 위하여 내가 그렇게 무언가를 성실히 쉬지 않고 해왔던 게 맞는지 자괴감이 든다. 자괴감이 꽤 많이 드는 거 같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딱히 나아질 거 같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으며, 그 '나아짐'을 위하여 이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삼십년 넘게 도돌이표를 밟아온 건지 모르겠다. 


이 시기가 지속되다 보면 나는 어쨋거나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 최면을 걸기 시작할 거다. 이렇게 지긋지긋하며 지리멸렬하고 금방이라도 끝내고 싶은 일상이지만 내가 끝내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도 하겠지. 스물 넷 즈음이었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할 거 같다는 생각에 오열한 적이 있다. 그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왕 살아야 할 거면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잘 살기 위해서는 이, 살아 있다는 것을 감당하는 데 써야 하는 에너지를 좀 줄여야 한다. 


회사 일 하면서 먹고 사는 데도 많은 버티기 에너지가 드는데 그 외에 내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거라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진짜 싫다. 그래도 어쨋거나 해야 한다. 정말 싫지만 내가 요절하지 못해서다. 이건 내가 서른이 넘어서 살아 있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죗값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감옥이나 지옥 같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도 이 수준이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란 걸 알고 있다. 


남들보기에 그리 나쁘게 타고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지긋지긋한 건지 나 역시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상이 높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에너지 레벨이 떨어지고 우울해지면 능률이 떨어진다. 하려고 목표했던 것들이 다 수포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어쩌면 진짜 명이 다해서 죽는 순간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찾지 못할 거 같다. 희망이나 꿈에 기대는 건 많이 해봤고, 언제나 피로한 일이었다. 성취한다 해서 기쁨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나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지탱할 만한 줄기 하나쯤은 필요하다. 그게 뭔지 찾아가는 여정이 되지 않을까. 


순간순간에 찾아왔다 잊혀지기 쉬운 감정 같은 게 되어서는 안 된다. 무형의 믿음 따위도 안 된다. 돈이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목표 지향적인 삶은 아니다. 해본 적이 있고 이미 실패했다. 사람이란 익숙한 형태의 고통으로 접어들기 쉽다는 걸 알고 있기에 주절주절 써봤다. 산 자들의 세상이라 불리는 이승에서 나는 무얼 해야 할까. 무엇을 하며, 무엇을 믿으며 이 기나긴 세월을 버텨서 밥벌이하고 풀칠하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을까. 성실과 노력과 꾸준한 것들에 대해 이미 질려버렸지만 너무도 지긋지긋한 상태로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목숨줄이 붙어 있는 한 노력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 살아 있는 이상 노력이라는 건 디폴트값이다.... 그럼, 실속 없는 노력은 그만하고 실속 있는 방향을 찾아내야만 한다. 


정말, 너무 싫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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