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툰 Sep 06. 2023

속 편하다는 죄책감

  01.


  동료들을 비롯하여 심리상담사도 '휴직 중엔 힐링에만 집중하라', '반드시 해외여행을 가라'는 등의 조언을 했지만, 나는 그런 속 편한 일이나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지옥 같았던 회사에 돌아가지 않아도 될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 와중에 휴직 후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카페에 오게 되었다.



  휴직 후 자그마치 한 달 만인 것 같다. 직장 동료가 충고한 것처럼 여유 있게 드라이브도 했고, 유명한 카페에 와서 아메리카노도 주문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오메가 미사일은 깨끗이 잊기로 결심했다. 등학생 딸의 개학이 코앞이라 위로차원에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다. 녀석은 방학인데도 여행 한 번 못 가고 학원만 돌다가 개학을 맞은 셈이다.


  안쓰러운 딸을 위한 휴식이라니. 명분도 참 그럴듯하지 않은가? 결코 나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휴식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느슨한 시간 앞에서 나는 더 당당해졌다. 종업원이 손님이 많아 대기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을 때에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나 시간 많아요.


  자리를 잡고 나서는 카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에티오피아와 콜럼비아 원두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생산지마다 맛과 향이 다르구나. 알아둬야겠어. 커피 잘못시키면 산미 때문에 돈 버린다니까. '


  그렇게 커피의 원산지별 특징을 읽다가 내가 시킨 것이 강한 산미가 특징인 아메리카노인 것을 알고 조금 당황했다. 실제로 내가 받아 든 커피는 방금 전에 봤던 설명대로 강력한 산미의 결정체였다. 고급 와인을 조심스럽게 음미하듯 아주 미량의 커피를 살짝 맛보았음에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02.


  나는 한 모금 마신 커피를 저 멀리 밀어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의 커다란 통창으로 이제 막 오후로 넘어가는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는 그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대화소리로 시끄러웠다.


  이를테면 '거대한 소음'이라고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의 대화내용도 뚜렷이 들리지 않았다. 그 쾌적한 백색소음이 나 역시 익명으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해 줬고 평온함을 느끼게 했다.


  아내는 옆에서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하고 있는 한편 딸아이는 그림 그리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거기서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왠지 나만 이 풍경에서 겉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들고 있던 책을 슬며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모든 느낌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했다. 


  음, 이 느낌은 뭐랄까. 굳이 표현하자면,


행복한데..?


   03.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어쨌거나 남들은 잘 다니는 직장을 못 버티고 나온 상황이지 않은가. 세상에 출퇴근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그중 인간관계가 만만한 사람은 또 얼마나 된다고.


  번아웃이 어떠니, 공황이 저떠니 주변 사람들 신경 쓰이게 하면서 공부하며 지금까지 깨달은 것이라곤 '역시 퇴사는 신중하게 해야 하는구나' 밖에 없는 상황. 그런 주제에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며 분에 넘치는 기분에 취해있을 자격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행복하다고 해서
죄책감 느끼지 마.
원래 네 것이었어.

  내가 내 편 들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내 편을 들어줄 수 없는 법이니까. 십수 년을 빼앗긴 채 살아서 내 것을 돌려받고도 황송한 기분이 들 지경이다. 그래도 죄책감이 든다면 그에 대한 형벌은 에티오피아산 산미 가득한 커피를 맛 본 걸로 충분해.

이전 15화 여보, 지금 오메가 미사일이 발사됐다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