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휴직일까지 일주일 정도를 앞두고선 어느 정도 긴장이 풀어졌다. 기존에 맡았던 업무들은 하나 둘 매듭이 지어졌고,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는 열외 되었다. 그러자 차츰 동료들과 가벼운 대화라도 할 짬이 나기 시작했다. 그 '짬'이라는 것은 비단 시간적인 여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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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을 막 신청했을 시점에는 심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스스로 너무 의기소침해져 있었던 데다가 다소 겸연쩍은 마음도 들었기에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것이 어려웠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십거리를 캐기 위해 나에게 접근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실상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좋아졌다. 나를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를 이해해 주는 이들 또한 있었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차츰 주변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모두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 또한 사소한 일에도 출렁이던 마음이 안정되면서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02.
휴직을 며칠 앞두고부터는 지인들에게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 왜 영영 안 볼 사람처럼 인사하세요?
그들은 자주 그런 말을 했다. 더 이상은 회사에 출근하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한 경험을 몇 번 했다. 가끔은 실수로 '휴직'이 아니라 '퇴직 인사를 왔다'라고 인사를 한 적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 아, 제가 그랬나요? 영영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라 그런가 봐요.
- 어쨌거나 여기 일은 잊고 맘 편히 지내고 오세요. 해외여행 꼭 다녀오시고요.
- 하하, 그래요.
03.
하지만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런 속내를 감추는 것만이 아니었다.
- 회사일이라는 게 그렇긴 해요. 협업하던 일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결국 한 사람이 져야 하니까. 서 과장님이 유독 여러 부서랑 협조해야 할 일이 많아서 힘드셨을 거 같아요. 누구도 서 과장님한테 싫은 소리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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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무실에 인사를 다니다가 한 동료가 그런 얘기를 했다. 많은 부서와 인원과 협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책임은 혼자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내 상황을 두고 한 위로의 말이었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해주는 위로란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 그러게 말이야. 그때 최 과장이 제대로 도와줬으면 내가 이렇게 휴직을 나갈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때 나는 그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봤어야 했다.
04.
'괜히 기분이 들뜨는 바람에 실언을 했구나.'
저쪽 파티션을 위로 나를 쏘아보는 최 과장의 눈빛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괜히 들뜬 마음에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 실수였던 것이다. 뭐라 변명할 여지도 없는 실언이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최 과장은 최근까지 성실하게 나를 도와주었던 동료였다. 어찌 보면 본인이 하지 않았어도 될 일까지 도와주는 바람에 내게 큰 힘이 되었고, 나 또한 필요이상으로 더 기댄 적도 많았다. 그랬기에 나를 쳐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분노보다는 배신감이 더 크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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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전과는 다른 태도와 표정으로 우리 관계는 파탄이 났음을 확연히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와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나의 경솔함 때문에 선한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05.
마음이 식어버린 연인과의 관계가 이럴까?
최 과장은 더 이상 평소와 같은 농담도, 미소도 없었다. 내가 도움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땐 내게 해줘야 할 일만 해주고 끝이었다. 두 번의 고별 식사자리가 있었지만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을 듣고 오해를 한 것이라면 어떻게든 풀기라도 할 텐데 이것은 그럴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 100% 나의 실책이었으나 이를 인정하고 사과를 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가 '내 속마음 어딘가에는 그런 생각이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겠냐'라고 따져 묻기라도 한다면?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를 되짚어봤자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간으로 덮어씌우는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휴직을 나가기 직전까지 그에게 최대한의 선의를 보이고자 노력했다. 간접적으로 사과를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회사라는 조직에 상처받았다며 휴직까지 내놓은 주제에 정작 다른 사람의 마음은 챙기지 못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마지막 날, 퇴근을 하며 인사를 돌았을 때에도 그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씁쓸했지만 어쩌겠는가. 뒤늦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휴직은 결코 퇴직이 아니기에 회사 동료들은 내가 돌아오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또한 그렇기에 유종의 미란 업무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