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육아휴직 신청일로부터 30일 이후 휴직을 나갈 수 있습니다.
인사담당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최근에야 이 부분에 대한 법규정을 찾아보며 '30일'이라는 기간은 강행규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퇴직이든 휴직이든 개인 사정에 따라 더 일찍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휴직을 신청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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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이나 더 있어야 된다고요?
-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는 30일 이후에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
인사담당이 머뭇거리며 말하는 눈치를 봤을 때, 30일 이전에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일반적인 케이스' 말고, 즉시 나갈 수 있는 '특별한 케이스'의 조건은 뭔가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길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그 친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과 '일'이 힘들어서 휴직을 나가는 입장에서 나로 인해 또 다른 사람이 피곤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30일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02.
곧 휴직을 나간다는 이유로 열외 된 일들이 있었다. 좋았냐고?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스코어로 따져보면 단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안 해도 되는 일보다는 내가 있는 동안 뭔가를 하자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 olenkasergienko, 출처 Unsplash 진행되고 있는 일이야 그렇다 치는데 아직 시작도 안 한 일까지 지금부터 해보자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작업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 내 후임자가 결정되고 나서는 이 양상이 더 심해졌는데, 그만큼 후임자에 대한 악평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한 후폭풍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업무 협조자들은 기존에 진행되던 업무는 물론이고, 아직 시작 못했던 골치 아픈 일들까지 내가 출근하는 동안 종결짓고 싶어 했던 것이다.
- 네? 휴직이시라고요? 다음 달부터요?
업무 유관자에게 나의 휴직 계획을 밝히면 첫 반응은 다들 이렇다. 내가 육아휴직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고, 워낙 빠르게 진행된 탓에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까지만 함께 하게 되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때 보통 상대방이 보여주는 의식의 흐름은 놀랐다가, 부러워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되돌아오는 수순이다.
03.
- 그럼 후임자는 정해졌습니까?
이내 현실로 의식이 돌아온 상대방의 다음 질문은 항상 이것이었다.
- 예, 김 과장님이 해주실 거예요.
이렇게 후임자의 이름을 말해주면 나오는 상대방의 반응 또한 대부분 같다.
- 같은 사무실에 계신 그 '김 과장님'이요? 그분은 업무 협조가 전혀 안되시던데요.
- 네, 뭐.. 그런 얘기도 있더군요.
후임자의 정체를 밝힐 때마다 괜히 상대방에게 미안해지곤 했다. 확실히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이렇게 악명 높은 사람에게 인계서는 또 얼마나 신경 써서 작성해 줘야 그의 직성이 풀릴까.
- 서 과장님, 죄송하지만 이번 일까지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원래 다음 달쯤 말씀드리고 진행하려 했는데 후임자분과는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 부탁을 들어주다 보니 정작 내 업무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다. 나중에는 휴직일에 임박하여 인계서를 쓰느라 또다시 야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04.
휴직계를 낸 뒤 30일 동안은 매일 쌓인 숙제를 쳐내느라 전쟁 같은 하루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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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업무 정리를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진행 중인 업무는 현황 정리만 해서 후임자에게 인계해 주면 될 것 같은데,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다는 게 이치에 맞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걸 궁금해할 시간에 일을 더 하는 편이다. 그런 질곡의 시간도 어느새 지나고 대망의 '마지막 출근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어엿한 '떠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신입사원 OT자료로 써도 될법한 수십 페이지짜리 인계서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 과제였고 누구에게라도 괜한 책 잡히기 싫어서 더 열심히 썼던 것 같다. 인계서는 초안이 나왔을 때부터 후임자인 김 과장에게 전달하여 공유했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속내를 통 알 수 없었다.
상관없다. 나는 이제 떠날 사람이니까.
05.
시계를 보니 퇴근까지는 약 30분이 남아있었고, 미처 짐정리도 못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차에 짐을 모두 실어놓고 나니까 이윽고 퇴근시간이 되었다. 저녁 회식과 점심 식사 등 수차례의 고별인사 때문이었을까? 부서원들은 놀라울 만큼 나의 '마지막 퇴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 나 이제 진짜 가볼게. 그 동안 고마웠어.
- 과장님, 다시 안올것처럼 인사하지 마세요. 맘 편히 지내고 돌아오세요.
나는 부서원들의 무관심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몇몇 친한 동료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 vonshnauzer, 출처 Unsplash 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법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게 퇴근하며 느껴지는 시원함인지, 휴직이 시작된다는 기쁨도 섞여있는지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잠시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 잊은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서 단톡방에 고별 메시지를 남기고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몇 년 만의 방탈출인지 원. 부서를 떠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만 봤지 내가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몇 달 뒤 다시 돌아오겠지만 아무튼 일단은,
내일부터 휴직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