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사이에 자리 이동을 2번이나 하게 되었다. 당연히 내가 의도해서 그런 일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처음 맡게 된 일이 버겁게 느껴지긴 했으나 가장 쉬운 일은 역시 <그동안 해왔던 일>이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부서장의 담당업무를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키는데 해야지.
아, 제안이야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에이, 알만한 사람들끼리 그런 순진한 소린 하지 말자. 부서장이 아무리 정중하게 제안의 형식을 취했다한들 거기에 정말 내 선택권이 있을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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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보통 <새로운 일>이란 거부감부터 들기 마련이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라고 하면 나는 이것을 꼽겠다.
바로 <인수인계>가 그것이다.나는 처음 배정받은 자리에 갔을 때에도 전임자인 선배로부터 A4지 2장짜리 업무기술서를 받은 게 전부였다.
미안해. 그런데 정말 난 이것밖에 몰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승인버튼을 클릭해 달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스스로도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우리 회사는 전산망을 통해 인계서를 첨부하여 결재받는 시스템이었다. 인수자가 승인을 하면 부서장이 최종 승인을 하고 인계인수 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내가 승인하더라도 부서장이 이런 성의 없는 인계서를 보고 가만있을까?
응, 가만있더라.
전임자에게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거라 생각했었지만 웬 걸.
인계서는 소리 소문 없이 결재가 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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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했다. 나는 자그마치 80페이지에 달하는 인계서를 쓰고 이 부서로 왔기 때문이다. 내가 쓴 인계서는 신입사원 교안으로 써도 좋을만하다고 칭찬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 칭찬받아서 뭐 하겠냐마는.
대게 그렇겠지만 나 역시 업무가 바뀔 때마다 업무 매뉴얼이 없어서 상당히 고생했었다. 전임자의 컴퓨터를 켰을 때, 환 공포증이 생길 만큼 바탕화면에 꺼내놓은 수많은 파일들을 확인하게 될 때면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그가 컴퓨터를 효율적으로 다룰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자료 정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파일이 어느 폴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최종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파일명까지. 기껏 파일을 열어봤자 어떻게 계산된 것인지 알 수 없도록 값 붙이기 된 데이터만 한가득.
그런 일들을 겪다 보니 나는 인계서만 보고도 누구에게 묻지 않고 업무처리가 가능하도록 최대한 자세하게 작성했었다. 물론 후임자 눈높이에서 보면 그조차도 충분치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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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가 가까운 부서에 있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정말 급할 땐 달려가서 물어볼 수 있으니까.
물론 주관식으로 질문했는데 단답식 답이 돌아올 땐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할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 이건 이렇게 하면 되는 건데 왜 몰라?
아니, 왜 다들 내가 원래 이 일을 해왔던 사람처럼 대하는 거지? 난 이 업무를 이번 주에 처음 시작했을 뿐인데.
게다가 업무설명은 30분 밖에 듣지 못했는데 말이다.
모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자기만의 언어로.
최근 짧은 기간 동안 2명의 전임자를 상대하는 동안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그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1도 생각하지 않고, 다 자기만큼 알고 있을 거라는 전제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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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전임자에게 화가 났다. 자기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내가 정리 중인데, 미안해하진 못할 망정 왜 두 번, 세 번 묻느냐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그가 뭉갠 업무수습하느라 다른 업무진행이 완전히 정지되어 맘이 급한데 말이다.
피씨가 깨끗해. 2020년 이후 자료가 하나도 없어. 하드카피도 전부 갈아버리고 갔어.
최근에 타 부서로 이동한 동기의 말이다. 전임자가 자기 있을 때 작성했던 모든 자료를 삭제하고 떠났다고. 사무용품은 볼펜 한 자루까지 쌀 쓸어가서 그야말로 모니터, 본체, 키보드, 마우스 말고는 남은 게 없다고 한다. 요즘 매일 야근하며 공백의 시기 현황자료 업데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전임자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소한 피씨에 자료는 지우지 않고 남겨줬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