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예를 아까워한다.
3-17) 자공이 매월 초하룻날 제사에 바치는(곡삭의) 희생양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지만, 나는 그 예를 아까워한다.
앞서 공자는 예는 사치스럽기보단 검소한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예의 자체를 없애라는 말은 아니다. 위 글에서 자공은 양을 아까워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예 자체를 없애려 하고 있다.
주자에 따르면 "곡삭의 예는 옛날 천자가 항상 늦겨울(섣달)에 열두 달의 달력을 제후에게 반포하면, 제후는 받아서 조상 사당에 보관하다가, 매월 초하루에 양 한 마리로써 사당에 고하면서 시행을 청하는 일"이라고 한다. 노나라는 문공 때부터 초하루에 고하는 일을 행하지 않았는데, 담당 관원이 그래도 양은 받치는 예의를 유지하고 있었느자, 자공이 그것조차 없애려고 한 것이다. 만약 양을 받치는 예(禮)라도 남아 있다면, 언젠가 사당에 고하는 예의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는 예를 아까워한다고 탄식한 것이다.
어떤 예의는 시대에 따라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예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문화와 전통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이 문화 대혁명으로 수많은 문화를 상실하여 한국의 문묘제례를 배워간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우리도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문화와 전통, 예의를 상실하였다. 서구 문명에 대한 예찬은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 다움'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예의를 잘 지켜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