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부패했으며 나쁜 일이 계속 겹치다
그러나 수백 명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반역의 혐의로 장기간 동안 감옥에 투옥되도록 선고되었다. 이렇게 불공평한 판결은 이들이 언론에게 육군이 지속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한다는 것을 폭로하거나 연설을 통해서 맹렬하게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반역죄에 관한 법률들은 공화국의 지지자들에게 자비심이라고는 없게 적용되었다. 반면 아돌프 히틀러가 곧 배우게 되는 바대로, 공화국을 전복시키려고 노력했던 우익 세력에게는 무죄로 판결하고 석방하도록 해 주거나 혹은 가장 작은 형량만을 선고하였다. 심지어 암살범들조차도 만약 이 범죄자들이 우익에 속해 있고 그 희생자들이 민주주의자들이었다면, 법원에 의해서 아주 호의적이고 관대하게 다루어졌다. 또 자주 일어났던 일들로는 육군 장교들과 우익 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법원에서 구금이 풀려 탈출하도록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과 가톨릭 중앙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공화국을 이끌어가도록 남겨졌는데, 이 공화국은 태어났을 때부터 곧 무너질 것 같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증오, 학대 그리고 때대로는 반대자들이 쏘아대는 총탄을 낳았다. 그리고 암살의 위협을 가하는 암살자들은 숫적으로나 결의에서나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저서인 서구의 몰락으로 그 명성이 하늘을 뚫을 것 같이 급상승하던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울부짖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그 몰락이 운명지어져 있었다!"
바이에른으로 시야들 돌려보면, 이 때 젊은 선동가인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운 민족주의, 반민주주의, 반공화주의 물결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제 그 기세에 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히틀러는 당시 연속되었던 사건들, 특히 그 중 두 가지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한 가지는 마르크화의 폭락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프랑스가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한 사건이었다.
마르크 화는 우리가 보아 온 것처럼, 1921년에 그 가치가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1달러에 75달러로 그 가치가 떨어졌고, 다음 해에는 400달러로 떨어졌으며, 1923년이 시작할 무렵에는 400달러까지 폭락했다. 1922년 가을에는 이미 독일 정부가 연합국들에게 배상금 지불에 관하여 모라토리엄을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에 대해 포앙카레 수상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독일이 목재의 운송에서 디폴트 상태임을 선언할 때, 전 전시 대통령이었던 이 융통성 없이 고집이 센 프랑스 수상은 프랑스 군대에게 루르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루르 공업 지대는 상부 슐레지엔을 폴란드에게 돌려준 이후에 독일의 상업적인 중심으로서 독일에게 국내 석탄과 강철 생산량의 오분의 사를 가져다 주는 알짜배기 지역이었다. 프랑스군이 점령한 이후, 이 곳은 독일의 나머지 지역과 차단되었다.
독일 경제를 마비시키는 이 회심의 일격은 일시적으로 독일 국민 모두를 단결하게 만들었다. 1914년 이후로 독일 국민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르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선언하였으며, 베를린의 정부에게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것은 소극적 저항 활동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육군의 도움을 받아서 사보타주와 게릴라 전쟁이 조직되었다. 프랑스군은 체포와 강제추방, 심지어 사형으로 맞섰다. 하지만 루르의 바퀴 하나도 돌지 않았다.
독일 경제를 목 졸라 죽이는 이런 사건은 마르크 화의 최종적인 급락을 가속화했다. 1923년 1월의 루르 점령 때는 1달러에 대해서 무려 18,000 마르크까지 그 가피가 떨어졌던 것이다. 7월 1일에는 160,000 로 떨어졌다. 8월 1일에는 1달러는 백만 마르크의 가치를 가졌다. 히틀러가 이제 때가 왔다라고 생각했던 11월이 되자 1달러를 사기 위해서는 4십억 마르크가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수치는 수 조가 되어 버렸다.
독일의 화폐는 문자 그대로 종이보다 못한 쓰레기가 되어 버렸고, 좀 더 온화하게 표현하더라도 그냥 가치가 없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월급이든 주급이든 급여의 가치는 제로로 감소했다. 중간 계층과 노동자 계층이 평생 저축한 돈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