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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경 Nov 17. 2022

성이라는 환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을 상기시켜 주는 어둠이라고

     

 네가 알려 주었다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너와 나의 연쇄     


 성은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과 벗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동시에 지녔다     


 나는 외로워도 우리가 되었다     


 찾은 적 없을지라도 나를 벗어나 우리로 확장되었다     


 어둠은 빛의 조각을 발견해 낸다          



                                                                          *         



 그것을 정복이라고 표현한다     


 다음 성은 미안성이었다 미안의 벽돌이 잔뜩 쌓인 이 성에서 사람들은 성좌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이곳에 적응하려면 꽤나 많은 슬픔을 쏟아 낼 것이라고 예측했고

 어긋나는 만남과 새까만 내면이 온통 들통날까 봐 겁이 났다     


 미안의 정서가 담긴 돌 하나에

 사람의 얼굴이 투영된 것만 같았다

 그 돌들 위에

 나의 돌을 둔다

 나를 따라 네가 돌을 둔다     


 이것은 미래까지 이어진다는 예언 같은 것이다 장례식장에 쌓이는 조문의 기도처럼     


 우리의 슬픔이

 먼 미래에는 과거가 되어 이어질 것이라는     


 기도는 항상 미래를 소망하다가 현재가 과거가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네가 말했는지 내가 말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의 말이 서로의 말이 되었는지도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일 뿐          

                                                                          


                                                                          *        



 어둠이 짙어지면

 성은 곡소리로 가득해진다     


 각자의 슬픔이 모여 하나의 메아리를 형성한다 밤을 악보 삼아

 감정을 변주 삼아

 호흡을 박자 삼아     


 우리가 제법 슬펐다 우리는 우리로서 울었는데     


 너로서는 울지 않았다     


 나로서도 울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우는 법을 몰라서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같이

 우리 같이     


 울어 주자

 모든 것을 너에게 줄게

 모든 자리를 양보할게     


 같이

 슬퍼하자          



                                                                          *         



 내게는 울지 못하는 병이 있었어

 아무리 슬퍼도 눈물이 안 나는 거야

 그건 슬프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공감을 못 하는 게 아닐까     


 네가 너무 좋은데

 너를 위해 울지 못하는 게 너무 슬픈 거야     


 그래서

 이곳에 왔어

 이곳에서는 우리잖아     


 외로울지라도 우리가 된다잖아     


 내 옆에 네가 있고 네 옆에 내가 있고      


 내 미안함을 너의 미안함으로 가득 채울 때     


 그럴 때     


 나는 울 수 있었어

 받아 내는 것이

 울음이라는 것을

 내 병의 진실을 알았어     


 네가 나에게 쏟아지는 순간을 무서워했는지도 몰라

 이제는 두렵지 않아

 이제는 울음이 멈추지 않아     


 슬픔이 우리의 빛이야

 우리가 곧 우주야     

 

 잊지 말자고 약속해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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