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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경 Nov 17. 2022

난춘(亂春)

 2014년 4월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자,

 우리     


 누구에게도 무해한 언술과

 누구에게도 삶을 망가뜨릴 권리가 없다는 지혜와     


 나를 공부하고

 너를 공부하며

 많은 이에게 옆이 되자     


 나아가서 많은 계절을 공부하자 벗어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무너지면

 새롭게 구축하자     


 폐허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믿으며

 그곳에서 빛을 만져 본 기억을 믿으며     


 나는 사실 달의 뒷면을 만져 본 적이 있고     


 손을 뻗어서 어두운 그 뒷면에 빛이 살아 있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고     


 빛이 선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둠이 악하다고 표현할 수도 없지만     


 내가 기대고 있는 건 빛과 어둠이 지닌 양면성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순간은 빛과 어둠이 대립하는 장면이니까     


 파열음 속에서 탄생해

 서술해     


 떨어지는 모든 것을 달의 흔적이라 생각할 만큼          



 2016년 12월          


 촛불 대신 내 삶이 망가지는 것이 먼저였다     


 나와 관계한 사람들이 무너지고

 내가 무너지고     


 시라고 쓰는 것이 낭자하게 흩어진 조각을 대변할 때     


 문장이 악이었다

 문장이 빛을 흉내 낸 악이었다     


 사실 빛과 어둠이 선과 악을 은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적어 내는 문장이

 너를 무너뜨렸던 기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내가 두 번 무너졌을지라도     


 조각

 조각

 끌어안고     


 내일을 기다렸다

 내일의 나는 내일이 있을 테니까     


 손목에 핏줄이 징그러웠다     


 고시원에서 마주친 부엌칼이 내가 나를 요리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밤이면 무작정 걸었고

 마주치는 사람에게 내 모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태어남과 사라짐     


 육체를 잃어버리는 것     


 육체 위에 나도 모르는 육체가 더해지는 것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 말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사랑 같아서 무서웠다          



 2020년 2월          


 달력을 넘기기가 무서웠다     


 우리는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를 우리와 분리시키고 싶었다     


 나는 나이고      


 나는 사실 나 아닌 것들이고      


 산이 무너져 도시를 덮치는 꿈     


 행성이 떨어져 도시의 기억이 사라지는 꿈


 누군가 잊어 주길 바라면서 누군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은 뭘까     


 나라고 얼마나 대단하다고     


 나라고 얼마나 윤리적이라고     


 내가 나여서 싫었던 날      


 나를 죽이는 놀이처럼 시를 쓰기 시작했던 날     


 내 앞에 나를 칼로 죽이고     


 내 앞에 나를 창문 밖으로 던지고     


 내 앞에 내가 다시 태어나서     


 나를 바라봐서     


 우리가 우리를 죽이고     


 그 공백에서 아무런 소음이 없어지자     


 조카가 내 옆에서 웃고 있었다     


 어른이 이래서     


 미안해          



 2022년 4월          


 신에 대해 공부했다

 언어에 대해 공부했다     


 남자는 남근 기능을 인식한 뒤

 상징적 거세를 한 뒤

 대상을 향해 향유한다는     


 그런데 상징적 거세가 불가능한 존재가 유일하게 있다는데     


 그러면 그 존재를 절대자라고 추측할 때     


 우리는 그 존재를 땅에서 하늘로 우러러보고 있을 때     


 그 존재를 향해      


 하나의 전시가 시작될 때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안을 곧게

 거세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을 완벽하게 믿지 못하므로     


 나는 거짓을 파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으므로     


 모든 말이 진실일 수 없으므로     


 침묵과 새겨짐을 바탕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전시를 겪고 있고 전시를 이루고 있다     


 그 전시장에 모든 거짓도 진실처럼      


 모든 진실도 거짓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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