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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녀 K Jul 26. 2023

17. 골프

아빠의 유산

구 이사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장녀 K도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광복 후, 분단, 군부 독재, 민주화를 거치면서 일본보다 10년 이상 늦게 사회가 변한 것 같아요. 저는 은퇴 후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 비교적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일본 책 중에는 참고할만한 것들이 좀 있었어요. 우리보다 먼저 직장인의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거죠. 어느 일본 작가가 은퇴한 남편을 가리켜 부인 신발에 붙어 있는 ‘젖은 낙엽’이라고 표현했는데, 무척이나 적절한 표현 같았어요. 하하하.”


IMF 정리해고 광풍이 은행에 몰아치던 어느 날, 부인이 자신을 불렀다고 했다.


“아직 집 대출금도 남았고, 아이들도 고등학생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은행 바닥에 젖은 낙엽처럼 붙어 있어야 해요.”


구 이사님은 부인 말대로 눈을 꼭 감고 젖은 낙엽처럼 직장 생활을 했다고 한다.


직장 생활을 끝으로 수모도 끝났나 싶었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이제는 ‘거실 건너편 사람’의 신발에 붙은 젖은 낙엽이 되었다며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구 선생님, 아까는 실례가 되는 것 같아 여쭤보지 못했는데요. 혹시 수술실에 들어가시기 전, 따님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뭘까요?”


구 이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아, 그게…. 저는 본래 화가가 꿈이었어요. 우리 때는 먹고사는 게 급하던 시절이라, 은행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결혼을 했으니까…. 꿈을 이룰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이제는 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네가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데 못 그리면 잘 그리는 친구에게 떡볶이를 사주면서 친하게 옆에서 지내면 되고, 수학을 못 한다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수학 잘하는 친구랑 친하게 지내면 된다고. 그 애는 있고 나는 없다고 속상해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장녀 K가 끼어들었다.


“결핍에 대한 이야기군요.”



“네, 네. 사실 아내와 저는 생각이 달라요. 저는 결핍을 다루는 법을 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폐의 1/3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나오니까, 숨소리가 마치 짐승의 소리야. 너무 아프더라고요. 차라리 죽이지 살려 두셨냐고….  신을 향한 원망만 생기고…. 근데 일주일 되니까, 또 살만해. 그래서 말할 타이밍을 놓쳤어요. 지난 늦봄에 둘째가 결혼을 했어요. 이제는 정말 집에서 할 일이 없어요. 여기 창작촌에 나와야 젊은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도와줄 수도 있어 너무 행복해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빠 생각이 많이 나요. 우리 아빠의 보험은 사실 엄마인데, 여전히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봐요.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빠가 많이 외로우실 거예요.”


“은퇴 후, 아쉬운 점은 없으세요?”


“대출담당이다 보니, 접대용이기는 하나 골프를 자주 다녔거든요. 골프도 골프지만, 경치가 참 좋은 곳에 골프장이 많았어요. 그런 시간은 그립네요. 하하하.”




문득 장녀 K는 엄마 지화자 여사의 골프세트가 창고에서 몇 년째 놀고 있는 게 기억이 났다. 생각난 김에 아빠가 다니는 골프연습장에 등록했다. 아빠 김필두 선생의 유일한 취미이자, 인간관계의 중심인 골프. 골프연습장에서 아빠와 마주치면 잠깐씩이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공은 잘 맞나.”


“공이 잘 맞는 게 뭔지 모르겠어.”


“매일 열심히 해야 해.”


“어.”


아빠 김필두 선생은 연습량에 진심이다. 장녀 K가 아빠와 골프 연습을 할 때면 2, 3시간은 해야 김필두 선생의 성에 차는 듯싶었다. 그리고 김필두 선생은 정말이지 진심을 다해 장녀 K에게 골프를 알려줬다. 마치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장손에게 남겨줄 가장 큰 유산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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