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누구
매주 월요일, 장녀 K는 홍대 부근에 있는 크로키 모임에 나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머리 아픈 일들을 잊을 수 있어 장녀 K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함께 크로키를 하면서 친해진 작가 A가 개인전을 가졌다. 코로나19로 어려웠던 시간들, 작가 A의 현실적 고뇌와 고통이 남일 같지 않았다. 전시 마지막 날, 작가 A를 도와주러 장녀 K는 전시장에 갔다. 때마침 구 이사님이라고 불리는 분도 전시 철거를 도와주려 왔다.
구 이사님은 직장 은퇴 후, 이곳 창작촌에 예술가 조합을 만들고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를 했다. 그날도 작가 A의 작품 철수에 손을 보태러 온 것이다. 작품을 철수하며 세 사람은 자연스레 요즘 사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구 이사님의 사연을 정리하면 이렇다. 스스로를 '창작촌 고양이 집사'라고 소개하는 구 이사님은 은행 지점장으로 은퇴를 했다. 요리를 배워 ‘거실 건너편 사람’인 부인과 함께 평화롭게 살 궁리를 하던 중, 자신의 몸에서 폐암이 발견됐다. 몇 해 전, 오른쪽 폐의 1/3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 천장에서 정작 ‘거실 건너편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두 딸들이 생각나 마음이 먹먹해졌다. 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전시장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자, 작가 A와 장녀 K는 구 이사님의 이야기도 더 들을 겸 자리를 옮겨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장녀 K는 구 이사님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길에 딸들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 뭔지 궁금했다.
구 이사님과 아빠 김필두 선생은 동갑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구 이사님이 묘사한 자신의 집에서의 모습은 아빠 김필두 선생과 거의 똑같았다. 귀가해서 집에 돌아오면, 자신의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밥도 스스로 찾아먹고 꼭두새벽에 나간다. 구 이사님은 ‘거실 건너편 사람’과는 교류가 없고, 이미 장성하여 따로 사는 두 딸들과의 카톡방 대화에서 생기를 얻었다. 이건 김필두 선생이랑 달랐다.
아빠 김필두 선생의 마음을 구 이사님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까? 아빠 김필두 선생과의 대화는 장녀 K에게 늘 어색하고 불편했다. 구 이사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아빠 김필두 선생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녀 K는 구 이사님에게 요즘 관심사를 물었다.
“저희 아버지랑 너무 비슷하세요. 새벽에 나가시면, 무얼 하시나요?”
“길 고양이 밥도 주고, 작가들 여행 가서 밥 줘야 하는 고양이들도 챙기고, 너무 바빠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 느껴서 너무 행복해. 허허.”
구 이사님은 은퇴 후 명함이 없는 자신의 삶에 큰 상실감을 느꼈다. 명함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닥치고 보니 예상 밖으로 생각만큼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봐왔던 경험에 비추어 은퇴가 있는 직장인의 삶이 좋았다고 했다. 정년이 없는 자영업자들이 주거래 은행에 안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란다. 아프거나, 망했거나.
구 이사님은 은퇴 후, 직장 생활에 바빠 미뤄뒀던 취미생활을 하다 얼마 안 돼서 암이 발견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오니, ‘거실 건너편 사람’도 암이 발견되어 곧바로 수술을 받으러 입원했다고 한다.
참으로 고단한 우리네 인생의 이야기이다. 입 대신 지갑을 열어야 하는데, 말이 많았다며 구 이사님은 불판의 고기를 뒤집었다. 식사 내내, 자영업자로 아직도 술에 의지하는 아빠 김필두 선생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