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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녀 K Aug 02. 2023

18. 세월에 장사 없다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

장녀 K에게 골프는 다른 게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아빠를 이해하고 아빠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택한 방법이었다. 같은 연습장을 다니며 골프를 배우다 보면 골프에 빠져사는 말수가 적은 아빠 김필두 선생의 비언어적 표현을 알아듣지 않겠냐는 생각인 게다. 나아가 남편만 생각하면 열이 치밀어 올라 병이 도질 것 같다는 엄마 지화자 여사를 위로하고, 또한 엄마에게 아빠의 언어와 비언어를 해석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잘 지내야 장녀 K를 부를 일이 없는 것이다.  


엄마의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아빠 필두 선생은 엄마가 환자인 줄을 잊은 거 같았다. 한때 생사를 왔다 갔다 하던 암환자 엄마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본능에서 오는 습관에 충실했다. 언제 엄마가 병원에 정기 검진 가는지는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기 검진 중인 엄마에게 전화해서 어디서 뭐 하고 있냐고 따지듯 물었다. 장녀 K는 정말 궁금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정말 아빠 필두 선생이 왜 그러는지를 알고 싶었다.



사실 필두 선생과 같은 골프장을 다닌다고 나아지거나 변한 건 없었다. 그냥 골프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 필두 선생이 골프라는 취미를 갖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장녀 K가 사춘기 소녀처럼 아빠를 미워하고 탓하기에 아빠는 많이 늙어 있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


엄마 지 여사의 병세가 차츰 회복하면서, 자연스레 장녀 K에게는 ‘아빠가 아프면 어떡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제 병들고 아파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연세이다. 무엇보다 엄마 아빠가 오손도손 사는 게 장녀 K의 뒷덜미를 놓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모른 채 만나기만 하면 다툰다. 장녀 K의 눈에는 엄마 아빠의 서로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신혼부부와 같았다.



엄마 지화자 여사는 병원으로부터 1년 간격의 정기검진을 통보받았다. 장녀 K도 덩달아 해방감을 느꼈다. 생계의 위태로움까지 감수하며 엄마의 간병을 책임졌던 싱글, 프리랜서. 장녀 K는 인생의 숙제 중 하나를 제출한 기분이다. 잘했든 못했든 모든 게 지나갔다. 장녀 K는 이제 페이지를 넘겨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침 커피 타임. 언제나 그랬듯이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재방송을 목적 없이 보고 있었다. 마침 한 심리상담 프로그램에서 어느 음주 운전자로 인해 졸지에 엄마를 잃은 남매의 사례를 다루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이 너무 가엾어 TV를 보는 내내 엄마 지화자 여사와 장녀 K는 눈물을 흘렸다. 지 여사는 울면서 말했다.


“그래서 암 걸려 죽는 건 행복한 거야. 암 환자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암 걸려서 행복하다고 기도가 올라온다니까.”


“다 정리할 시간을 줘서 그런 거지?”


“그래, 저 사람들 가여워서 어떡하니, 흑흑.”


그날이 그날 같았던 코로나19 봉쇄 기간은 엄마 지화자 여사가 아픈 덕에 화들짝 놀란 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정작 암이 뭔지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겨우겨우 버텨낸 것이다. 게다가 죽음을 남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장녀 K와 가족들에게는 세례가 되었다. 이제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 필두 선생은 부인 지 여사를 따라 몸이 말랐고, 장녀 K는 흰머리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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