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결국 양다리를 걸친 셈이었는데 그 구두를 받고 사이즈를 확인한 후부터 치욕의 시간을 보냈단다. 상대도 상대지만 자신에게 더 화가 났고, 정신을 차리고 나자 더러운 똥 밟은 건 같은 처지인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런데 의문이 풀리지 않은 것은 남자는 그 후 매장에 바꾸러 오지도 않았고 이 구두 건에 대해 어떤 클레임도 걸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럼 그 여자가 사이즈를 다르게 신는 사람? 그런 생각에 이르자 더 분노가 차올랐는데······ 그때부터 가장 확실한 타격을 생각했다고 여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흥분조의 목소리로 말했다.
완벽한 커플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부러워했죠. 외관상도 그렇지만 모든 조건이 너무 그럴 듯했었어요. 비혼주의자이던 제가 마음을 바꿀 정도였죠. 그쪽이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 주는 바람에 시원한 한 방이 되었어요.
나도 모르게 불쑥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사귀었던 분도 알게 되었군요?
네, 알다 뿐이에요? 교제하는 여자가 알게 되었다고 손해 배상을 요구했어요. 그 여자는 저와 사귀던 중 만난 사이라고 하네요. 더 웃기는 건 뭔 줄 아세요? 이왕 버릴 거면 구두를 돌려 달라고 하더군요. 방금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아예 버릴 게 아니라 작품으로 만들어야겠어요. 결혼의 환상이 내 신념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상기하게요.
어떤 작품으로 만들지 저도 조금은 호기심이 생기네요.
내 대답이 진지하게 여겨졌는지 여자는 명함을 한 장 주면서 언제 시간 되면 다녀가라고 했다. 한 달 뒤 국내에서 가장 큰 J미술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상처는 먼 사람에게서 받는 게 아니었다. 유독 나를 생각해 준다는 사람에게서 받는 거였다. 그래서 그 상처는 상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흠집을 남겼다. 버려질 명품 구두가 작품으로 어떻게 탄생할지 나리와 그 전시를 보고 싶은 마음이 왠지 들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 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에게 전시회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문자를 보냈다.
카페를 나오며 나도 모르게 눈길이 내 다리 밑으로 쏠렸다. 지금 신고 있는 구두는 작년 여름쯤 산 구두였다. 지하철이 가까이 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 나는 내 구두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검정 가죽의 단순한 로퍼는 내 발을 안쓰럽게 감싸 주고 있었다. 먼저 오른쪽 신발을 벗어 밑창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왼쪽 신발을 벗어 밑창을 살펴보았다. 둘 다 벗어 구두를 들어보자 밑굽 사이즈가 금방 눈에 들어올 만큼 차이가 있었다. 오른쪽이 1cm쯤 더 닳아 있었다. 여자의 구두처럼 어긋나 있었는데도 나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었다. 왼쪽은 앞굽 쪽이 낮았고 오른쪽은 뒷굽이 낮았다. 밑굽의 상태들만 보면 제구실하지 못할 게 뻔했다.
다시 구두를 신고 걸어 보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내 구두의 닳은 부분들이 어째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동 소리와 함께 여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페어’예요. 나는 지하철역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