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에 뜨는 예쁘고 똑똑한 강아지, 산책하다 만난 성깔 있는 강아지, 친한 친구들이 키우는 사진으로만 봐도 보송보송 사랑받는 강아지. 이 세상에 강아지가 진짜 많은데 내 강아지는 없다. 나는 왜 강아지를 키울 수 없을까? 오늘도 아빠한테 강아지 키우자고 했다가 글을 쓰게 됐다.
1. 내 집이 없다.
내가 데려오는 강아지가 자기 집이라고 느낄만하게 해줄 집이 없다. 나는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고 본가에서 키우자니 그럼 내가 없다. 결국 부모님이 돌봐줄 테니 내가 키우는 게 아니다.
2.시간이 없다.
지금 20대라 한창 나가서 일할 때다.
내 일상에 강아지가 들어온다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걔한테는 내가 전부라는 걸 알고 있다. 걔를 먹여 살릴 돈을 벌어오려면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다. 내 마음 같아선 산책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시켜주고 싶은데 그렇게 해줄 수가 없다.
3.용기가 없다.
헤어질 용기가 없다.
나는 어릴 때 강아지를 무서워했다. 사촌 언니가 키우는 강아지가 무서워서 언니 집에 가면 “언니 잡아줘~”, “잡고 있어? 나 들어갈게” 하고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작은 말티즈 두 마리라서 소파에는 못 올라오니까 꼼짝없이 소파에만 올라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걔네들 덕분에 더 이상 강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제 막 사랑하게 됐는데 걔들은 늙어버렸다.
언젠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겠지.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아닌데도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중학생 때 처음 본 내 기억으로는 발발 돌아다니던 새끼 강아지였는데 어느 순간 노견 티가 제법 난다.
내가 만약 강아지를 키운다면 얘가 더 오래 살지 내가 더 오래 살지 궁금할 것 같긴 하다. 그래도 높은 확률로 쟤가 더 일찍 죽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하기 싫어진다. 그래도 나는 강아지가 키우고 싶다. 아빠는 사람의 이기심이라고 한다. 아빠는 강형욱의 랜선 수제자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산책시켜줄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키워야지 하며 미루는데 미루는 이유 중에는 이별이 무서워서도 있는 것 같다. 최대한 늦게, 내가 적절한 상황일 때 데려오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의 친한 언니 H는 강아지를 키운다. 정말 각별하다. 내가 본 애견인 중에 가장 각별하다. 언니는 강아지를 보면 죄책감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다 보면 있지도 않은 미래의 내 강아지에게 죄책감이 든다. 나도 언니만큼 미래의 강아지 (미강이)를 사랑해줄 수 있을까? 나는 언니가 죄책감이 든다는 말이 그만큼 언니의 강아지 여름이를 사랑한다는 말로 들린다.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게 꼭 애를 낳아봐야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다. 여름이는 언니를 바라보고 언니도 여름이를 바라본다. 여름이가 언니를 바라보는 그것만큼 같이 바라봐주지 못해서 미안해한다. 그래도 언니가 보내오는 여름이 사진을 보면 사랑받고 있는 강아지라는 게 화면 너머로 느껴진다. 나는 여름이가 사랑받는 위풍당당 강아지라는걸 알고 있다. 언니도 알고 있을까?
나는 미강이에게 어떤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미강이를 데려올 날을 기다리면서 상상한다.
이름을 짓는다. 미래에 있을 강아지 미강이에게 너무 많은 이름이 지어져 이제 헷갈린다.
산책할 때 한참을 기다려주는 보호자가 되어야지. 나는 SNS 중독자인데 걔한테는 산책이 SNS라고 하던데 그러면 주인답게 내 강아지도 SNS를 기깔나게 해주게 기다려줘야지 다짐한다. 아플 때 돈 몇백은 턱턱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경제력을 갖고 싶다.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미강이가 아플 때 내가 큰돈을 쓰는 걸 몰랐으면 좋겠다.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수명을 미리 떼어주고 시작하고 싶다. 미강이를 생각하면 설레고 슬퍼진다. 돈을 모으고 책임감을 기르고 이별할 때도 내가 보호자여서 행복했던 강아지로 자신할 수 있게 준비한 상태에서 데려오고 싶다. 그때도 나는 욕심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