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그랜트 작가가 쓴 기브 앤 테이크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여기서 말한 고결한 본능이란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베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선한 마음이 천대받게 될까 혹은 호구로 여겨버릴까 두려워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말에 나도 적극 공감하고 호의를 베풀며 사는 것을 두려워한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 애덤 그랜트의 책에서 주장하듯 베푸는 ‘기버’로 살아야 진짜 더 강한 힘을 얻게 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여 느끼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기브 앤 테이크책 표지에는 주는 사람이 성공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 책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와튼스쿨 조직심리학 교수이자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직심리학 학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애덤 그랜트는 기버, 매처, 테이커에 대해 연구했고 연구한 내용들을 이 책에 담았다. 책에서 이 들의 차이점과 왜 기버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기버는 타인 돕기, 조언하기, 공적 나누기, 남을 위해 인간관계 맺기 등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판단하고 매처는 손해와 이익이 균형을 이루도록 애쓰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 기회나 성공 등에 초점을 둔 사람을 테이커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공 사다리를 놓고 봤을 때 가장 꼭대기에 올라 있는 최고층을 사는 사람도 기버이고 가장 아래에 있는 최하층에 사는 사람도 기버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중간에 매처와 테이커가 있다.
기버가 최하층과 최고층에 나뉘어 있는 원인으로 성공 사다리 가장 위에 위치한 기버들은 먼저 베풂으로써 훗날의 성공을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거기에 포커스를 맞췄고 가장 아래에 있는 기버들은 귀가 얇아 중심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당하기만 하거나 자신의 성공과는 무관하게 그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이 지켜야 할 것도 지키지 못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호구라는 프레임이 써진 것이다. 따라서 기버로써 남을 위하는 마음과 나의 미래에 대한 성공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이끌어가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욕먹지 않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쓴 기버가 아닌 내 것을 지키되 타인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먼저 선의를 베풀 수 있는 강단이 있는 사람만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오지랖으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고 언젠가부턴 주는 게 당연한 사람이 돼서 호구로도 살아봤고 주변 사람들이 제발 퍼주지 말고 네 것이나 챙기라며 핀잔을 듣는 날이 많았다. 여전히 오지랖으로 인해 손해 보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그럼에도 빼앗기보단 주는 것이 속 편하다.
그렇다고 마냥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진정한 기버로서의 삶을 몸소 느껴 보고 싶다는 말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는지 느껴보고 싶다는 의미다.
3년 조금 넘게 유튜브를 하고 있고, 같은 시기에 시작한 타로 채널들 중에 내 채널보다 구독자가 더 적거나 조회수가 더 적은 채널도 있고 반대로 더 많은 채널도 있어서 그저 평범한 채널이라 생각한다.
나름 채널을 운영하면서 무료 나눔과 이벤트를 꽤 자주 진행했음에도 채널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말없이 해주면 좋으련만 나는 당연하게 여기고 성질 고약한 사람이 공짜만 바라는 모습은 보기 싫어서 싫은 소리를 꼭 하고 만다.
이럴 거면 안 하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요상한 성격이라 또 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진정한 기버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주고 싶어 하면서도 마냥 공짜만 바라고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미울까.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아야 진정한 기버이고, 지혜로운 사람일 텐데 나는 지혜롭지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은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도 든다.
썸네일 제목 때문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니 나의 속 좁음에 내가 실망을 하곤 한다.
오래전 '예언'이라는 주제로 기존보다 조회수가 잘 나왔는데 그 이후 여러 타로 채널에서 '예언'이란 제목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
이후 '소름 돋는 예언'의 썸네일 제목으로 또 조회수가 올랐는데 역시나 여러 타로 채널들이 '소름 돋는'이라는 키워드를 따라 쓰기 시작했고 어떤 채널은 그 제목 덕분에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주 사용하고 있다.
최근 몇 달 전에는 2년 전인가 썼던 '신들린 예언'이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올렸는데 내 채널 영상 중 가장 많은 조회수를 얻었다. (27만 회)
그 직후 많은 타로 채널들이 똑같이 신들린 예언이나 '신들린'이란 키워드를 써서 조회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썸네일 제목을 크게 포인트를 짚어서 짧게 쓰는 편인데 어떤 채널은 늘 썸네일 제목을 길고 작은 글씨로 쓰더니 신들린 예언 영상 조회수가 터지자 바로 며칠 뒤 썸네일 제목을 커다랗게 써 둔 걸 보고 참 많은 타로 채널들이 내 채널을 신경 쓰는구나 체감하게 됐다.
또 며칠 전에는 '역대급'이라는 키워드로 일반 제목에 썼더니 바로 이틀 뒤 썸네일 제목에 역대급이라고 쓴 타로 채널을 보게 됐는데 내가 속상한 건 그렇게 따라한 사람들의 조회수가 월등하게 많다는 거다.
죽 쒀서 남주는 것처럼 열심히 고뇌해서 만든 제목들을 그들은 거저 가져가서 많은 조회수와 수익을 얻는데 내 조회수는 여전히 고만 고만하니 속상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불법도 아니고 유튜브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유행어나 제목 등을 따라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그저 속앓이만 할 뿐이다.
가장 파급력 있는 채널에선 내가 몇 달 전 자주 리딩에서 언급했던 '솔방울'을 화면에 배치한 것을 보고 많은 타로 리더들이 내 채널을 보고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은 반면, 타로 리더들은 내 영상들을 신경 쓰지만 구독자들에겐 잔소리꾼에 주면서 싫은 소리나 해대는 고약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조회수가 오르지 않으니 우울해지기를 반복한다.
얼마나 속 좁은 모습인가.
이리 속이 좁은 사람이 기버가 되고 싶어 한다.
속 좁은 내가 왜 굳이 기버로 성공하고 싶어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첫 째, 인정 욕구가 강하다.
그 인정 욕구엔 진짜 있는 그대로 내가 직접 이룬 것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앞서 말한 것처럼 타고나길 빼앗는 것보단 차라리 빼앗기는 편이 낫다.
빼앗기고 속이 좋을 리 없지만 빼앗고 나서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후회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래서 속 좁은 나라서 그냥 대충 쥐 죽은 듯이 살면 좋을 것인데, 안젤리나 졸리가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지어 준 것처럼 그만큼의 선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후회 없이 살았노라 하고 생을 마감하려면 베풂만이 답이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미치도록 기버가 되고 싶다.
내 밑바닥이 이렇게 보잘것없이 속 좁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버로 성공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적나라하게 밑바닥을 드러냈던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내면을 다스리지 못해서 나에게 결국 민낯을 드러내고 밑바닥을 드러내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발톱을 드러냈던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중엔 스님도 있고, 믿었던 20년 지기 친구도 있고 수강생도 있고 가족도 있다.
내 민낯조차 부끄럽기 짝이 없는 속 좁은 심성이 감히 누굴 용서하냐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내 속이 좁은 것이 밑바닥이라면 내가 본 그들의 민낯과 밑바닥은 잔인할 정도로 거칠고 감춰져 있던 어둠이 생각보다 깊었기에 속 좁은 내가 견디기엔 너무 버거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아직 그들을 다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그 마음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서가 아닌 이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나는 아직 그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나는 오늘 내 민낯과 바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공개적으로 선언해서라도 달라지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걸어서 오늘 이곳에서 이 글을 통해 고해성사를 하듯 선언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 성장해 있기를 바라면서, 더 이상 남 탓을 하지 않고 그때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내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속 좁은 어린아이 같은 철없는 마음에서 벗어나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성인(聖人)이 되기를 희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