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보내는, 서울 20억 자가, 병원장 사모님 미쎄쓰 킴!
방학이 끝나가는 주말. 일주일 가까이 서울에 다녀오느라 냉장고를 비우고 갔던 김 여사는 장 볼 아이템들을 메모 어플에 적고 있었다.
김 여사가 주부이긴 하지만, 장 보는 건 참 수고로운 일이었다.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분석하고, 장 볼 것들을 마트에서 사와 냉장고에 소분하거나 정리해 차곡차곡 넣는 일. 이 모든 과정이 장 보는 데에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장 볼 것들을 마트에서 사오는‘ 이거만 생략돼도 훨씬 편할 텐데…
김 여사는 문득, 로켓프레시로 매일 새벽, 장 보러 직접 나가지 않아도 과일이며, 야채며, 우유며 잔뜩 배달되던 서울 생활이 떠올랐다.
‘그건…진짜 좋았지…’
아무리 서울에서 이번에 보기 좋게 원투 잽에 KO 녹다운까지 당한 김 여사였지만, 서울에서의 배달 생활은 정말 그녀에게 끊을 수 없는 매력이었다. 제주도 점차 쿠팡느님과 컬리느님이 힘써주셔서 마트 배달 문화가 자리잡고 있긴 했지만…여전히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많았다.
이마트 같은 마트 앱도 4만원 이상 채워야만 무료이다 보니, 조슈아와 둘만 사는 집 살림에 4만원씩 장바구니를 꽉꽉 채우다 보면 필요한 것보다 안 필요한 걸 더 채워넣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구매하고 나서 돌아오는 건, 냉장고에서 다 먹지 못 해 썩어가는 식료품을 보며 쌓여가는 김 여사의 죄책감 뿐이었다.
그래서…오늘도 김 여사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근처 마트로 향한다.
“조슈아, 준비해. 나가게”
“엄마만 다녀와. 나 집에 있을래.”
“…휴대폰 보려고 하는 거잖아.”
“아, 나도 좀 쉬자. 내일 개학인데.”
“엄마는 지금 서울 다녀와서 한숨도 못 쉬었거든? 지금도 마트 가서 다음주 먹을 반찬이랑 국이랑 하려는 거거든? 엄마보다 못 쉬었어 너가?!!!!”
“…알았어…알았다고.”
김 여사의 불호령에 조슈아는 싫은 내색을 팍팍 내며 잠바를 입었다.
‘한 번 말하면 좀 들을 것이지…‘
보통은 김 여사도 조슈아에게 이런 싫은 소리까지 해가며 꾸역꾸역 마트에 데려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냉장고가 텅 비었기에 장 볼거리가 꽤 많았다. 그래서 고사리손일지언정, 조슈아의 손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본 것 좀 같이 들어달라고 하면 조슈아가 더 안 따라나설까봐, 김 여사는 일단 따라오라고 우격다짐으로 조슈아에게 외쳤던 것이다.
차를 타고 2분 정도 운전하니 마트가 보였다. 주차를 하고, 차 문을 잠그려는데 얼핏 티모시의 엄마와 티모시가 마트로 들어가는 게 보인 것 같았다.
‘티모시….페레로로쉐…..으….또 열 받네‘
김 여사는 둘의 뒷 모습을 보니 또 다시 페레로로쉐 사건이 생각나 속이 부글부글했다. 제주로 돌아와 혼자 보내는 평온한 일상을 되찾으며 서울에서의 상처를 겨우 꿰매고 있던 참이었는데, 티모시를 보니 갑자기 그 상처에 소금이라도 비빈 양 가슴이 따끔따끔거렸다.
“조슈아, 잠깐만 있다가 들어가자.”
“왜?”
“아니…그냥.”
“왜? 그냥 빨리 가. 나 마트 갔다가 빨리 집에 갈래”
조슈아를 붙잡아둘 또렷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던 김 여사는, 가지 못하게 잡고 있던 조슈아의 팔을 슬그머니 놓았다. 어른이 돼서 조슈아에게 “티모시랑 마주치기 짜증나니까 이따가 가자”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지만 조슈아는 김 여사의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티모시 모자와 마트 문 앞에서 딱! 조우하고 말았다.
티모시 엄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김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입 밖으로 상냥한 인사를 내뱉고 말았다. 입은 안 웃고 있는데, 눈만 반달처럼 웃고 있는…시트콤 같은 데서나 보던 바로 그 어색한 표정으로 말이다.
“아..안녕하세요.”
티모시 엄마가 낮은 텐션으로 김 여사의 인사에 답했다.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티모시 엄마의 텐션을 생각하면 이건 비교할 수도 없이 낮아 지하를 뚫고 내려갈 기세였다.
애들끼리도 대충 인사를 한 후, 김 여사 모자와 티모시 모자는 자연스레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제 김 여사는 최대한 장을 보면서도 그 둘과 마주치지 않게 곁눈질로 사방을 살펴야할 것이었다.
“엄마, 나 과자 보고 있을게.”
“알았어. 거기만 있어 그럼. 엄마가 장 볼 거 다 보고 거기로 갈 테니까.”
“오케이.”
조슈아가 신나서 과자 코너로 달려갔다. 안 오겠다고 떼 쓰던 사람이 맞나 싶게 조슈아의 발걸음을 가벼워 보였다.
‘훗, 애는 애네 아직.’
김 여사는 주위를 신경쓰며(티모시 엄마가 있지는 않은지) 차례차례 장을 보기 시작했다.
우유, 계란, 사과, 시금치, 감자, 토마토, 양배추, 브로콜리…
얼추 장 봐야할 것들을 바구니에 담은 김 여사는 조슈아가 있는 과자 코너로 갔다.
집중해서 과자를 보고 있는 조슈아 옆에 티모시도 있었다.
김 여사는 티모시를 보자 어색해져 뭐라 반응해야 하나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조슈아의 친구를 보고 먼저 인사하거나, 다정하게 말을 걸던 김 여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티모시는 좀…‘
김 여사는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조슈아 팔을 잡아 끌었다.
“조슈아, 골랐지? 얼른 가자”
“아 엄마 잠깐만.”
“얼른 와”
김 여사는 조슈아를 재촉했고, 조슈아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 두 봉지와 더불어 초콜릿 하나를 황급히 더 추가했다. 페레로로쉐였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나 좋아하는 걸…저 녀석이….으…아직도 화나’
김 여사는 조슈아 손에 든 페레로로쉐를 보며 다시 한 번 화를 삭였다. 조슈아를 끌고 나오는데 티모시 손에도 페레로로쉐가 있었다. 무려 두 개였다. 김 여사는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으이그, 역시 욕심쟁이. 두 개나!!’
티모시 엄마와 마주칠까 무서워 얼른 계산을 하고, 조슈아와 황급히 차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김 여사를 불렀다.
“이모!! 조슈아 이모!!!”
티모시였다.
뒤를 돌아본 김 여사는 깜짝 놀라, 순간 속으로 얼어붙었다.
‘뭐지? 쟤가 왜 나를? 또 무슨 말로 날 열받게 하려고?’
김 여사는 조슈아에게 차문을 열어주며 무표정도, 웃는 표정도 아닌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티모시에게 말했다.
“티모시, 무슨 일이니?”
“이모! 저 저번에 이모가 페레로로쉐 사 준 이후로 맛있어서 매주 먹고 있어요. 이거, 조슈아 주세요. 아까 물어보니까 아직도 페레로로쉐 좋아한다고 하던데.”
티모시가 내민 건 세 구짜리 페레로로쉐였다. 문득, 티모시 뒤편을 보니 티모시 엄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손으로 바이바이하고 있었다.
“티모시….”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밖에 모르나 싶던 티모시와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페레로로쉐라니…김 여사는 티모시에게 순간 너무 미안해져 달려가 안아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른인 내가 그렇게 어린 애한테 꽁해 있는데, 저 어린 애가 나한테 먼저 손 내미네..’
김 여사는 엄마에게로 뛰어가는 티모시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티모시!! 잘 먹을게!! 담에는 이모가 꼭 또 사줄게!! 잘가!!!“
차에 탄 김 여사는 뭉클한 마음으로 조슈아에게 페레로로쉐를 건넸다.
“티모시가 너 주래. 아까 티모시가 너한테 뭐 물어봤어?“
“응. 페레로로쉐 좋아하냐고 아직도.“
김 여사는 페레로로쉐 초콜릿처럼 사르르 달콤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서울에서 뺨 제대로 맞고, 제주에서 치유 받네. 역시 제주, 미워할 수가 없어!!‘
※ 이 시리즈는 병원 운영, 초등학생 육아, 국제학교 생 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라이프스타일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은 하이퍼 리얼리즘 픽션입니다.
남의 집 얘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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