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보내는, 서울 20억 자가, 병원장 사모님 미쎄쓰 킴!
“어유, 먼지야. 이럴 줄 알았어!!!! 아오!! 제주나 서울이나 할 일 투성이야!!”
현관문을 열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김 여사가 서울 집 상태에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걸 때마다 남편에게 청소 좀 제대로 하라고 했건만… 남편의 눈에는 이 굴러다니는 하얀 먼지 구덩이들이 안 보이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슈아는 오랜만에 자기 방으로 가 침대로 점프해 누웠다.
“나이스!! 방학!!!”
“조슈아!!! 밖에 나갔다 왔으면 먼저 손 씻고, 발 닦고, 세수도 하고!! 바깥에서 입은 옷 갈아입고 그러고 누워!!”
“네네~마미~~”
조슈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짜증이 났지만 김 여사는 대거리할 힘도 없었다. 언제 이 큰 집을 싹 다 청소하고, 정리한 다음에 캐리어 정리까지 할지 눈 앞이 깜깜했다.
일주일 짧은 방학이라 서울에 올라온 김 여사 모자는, 국제학교에서 거의 매달 있는 짧은 방학 때 서울에 오게되면 하는 루틴이 있었다. 바로 남편의 병원에 들려서 이곳저곳 살피고 시댁, 친정을 차례대로 도는 것이었다. 그러다 조금 짬이 나면 김 여사의 서울 친구들도 만나고.
이번 일정이 바로 그 짬을 낸 서울 일정이었다. 꽉찬 5박 6일.
보통 2박3일 정도로 서울에 거의 점찍다 가는 수준으로 짧게 있던 김 여사가 이번에는 일정을 좀 길게 잡았다. 서울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을 두 번이나 잡았기 때문이다. 이번주는 국제학교의 짧은 방학 기간이자, 그녀의 생일 주간이었다.
결혼하고, 육아를 하면서 ‘생일 주간‘ 같은 건 잊은지 오래였다. 그녀 자신도 육아하느라, 제주에 내려가서 적응하느라 너무 바빴고, 그녀의 친구들도 각자의 일상을 버텨내느라 바빴다. 대개의 40대가 그렇듯, 어느덧 자신의 생일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번달, 김 여사가 서울 친구들과 대화하는 단톡방에서 다음달 둘째주에 서울에 갈 예정인데 혹시 만날 수 있는 사람 있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어? 연주 생일이잖아 그때.>
<맞아. 그때 연주 생일인데 우리 그럼 오랜만에 다같이 뭉쳐서 연주 생파하자!!>
<오 콜!! 좋아좋아!!>
김 여사 포함 다섯이 있는 단톡방에서 갑자기 김 여사의 서울 방문 때 생파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약속이 잡혔고, 바쁜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그녀의 친구들답게 하루에 다 모이기는 힘들어 이틀에 걸쳐 둘, 셋씩 모이기로 한 것이다.
서울 방문 때마다 반복되던 친정, 시댁만 들리는 똑같은 일정이 아닌, 이번에는 좀 특별한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김 여사는 이번 서울 나들이가 설렜다.
‘휴, 힘내자! 얼른 청소하고 나가서 오빠 병원 들려서 거기도 좀 청소하고!‘
마치 미션 퀘스트와도 같은 그녀의 서울 일정이 스타트됐다!
그녀는 2배속 버튼이라도 눌린 사람처럼 엄청난 속도로 굴러다니는 먼지 더미와 설거지통에 쌓인 밥그릇들을 닦기 시작했다.
‘어휴…진짜 물이라도 담아놓지…’
말라 붙은 밥풀이 떨어지지 않아 손톱으로 밥그릇을 긁자 기분나쁜 소리가 슥슥 김 여사의 귓전을 때렸다. 조슈아는 여전히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조슈아!! 누울거면 차라리 소파에 누워!!! 침대에 바깥에서 입던 옷 입고 눕지 좀 말라고!!!“
김 여사는 조슈아에게 다시 한 번 단전에서부터 끌어오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샤우팅을 하고(이미 그녀는 조슈아의 소정청 이슈를 잊어 버렸다-4화 참조) 집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빠른 속도로 짐 정리까지 마친 후 김 여사가 조슈아에게 외쳤다.
“가자! 일정 빡빡해! 일단 아빠 병원부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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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남편의 병원에 들린 김 여사는 환자가 두어 명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을 지나 조슈아를 데리고 창고처럼 쓰고 있는 직원 휴게실2로 직행했다. 그 곳은 조슈아와 김 여사가 남편의 병원을 갈 때, 남편이 병원에서 밥을 시켜먹을 때, 주문한 물품들을 쌓아놓을 때 등 여러가지 용도로 쓰고 있는 한 평 남짓한 방이었다.
<우리 왔어>
김 여사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좀만 기다려. 환자 보는 중 >
김 여사는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방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상자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남편이 뭔가를 시켜먹고 제대로 닦지 않아 얼룩이 가득한 작은 책상도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빡빡 닦았다. 책상 위 얼룩은 설거지통 밥그릇의 밥풀처럼 오래돼 잘 지워지지 않았다. 김 여사는 또 손톱으로 북북 그 얼룩을 긁었다.
<오늘 뭐 한댔지? 진료실로 들어와>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 단 1초도 쉬지 못 하고, 휴게실2를 정리하고 있던 김 여사에게 남편의 문자가 도착했다. 김 여사는 방에 딸린 작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는 조슈아를 향해 말했다.
“엄마, 아빠한테 다녀올 테니까 이따 아빠랑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어.”
“오케이”
조슈아는 휴대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 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김 여사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삭이며 남편의 진료실로 향했다.
“몇 시에 왔어? 오늘 뭐한다고 했지?”
“아침에 말했잖아. 아, 그리고 집 좀 치우지 그게 뭐야.“
“깨끗하지 않았어?“
“뭐? 오빠 눈에는 그 먼지들이랑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들이 안 보여?“
“아유, 나도 병원 끝나고 집에 가면 녹초야. 청소랑 설거지 그래도 안 하진 않아. 하려고 노력은 한다고.“
“어휴…“
김 여사는 자신이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 단 1초도 못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 여사가 뭐라고 뭐라고 잔소리를 이어가기에 남편은 바빠 보였다. 남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뭐 한다고?“
“이마, 미간이랑 사각턱 보톡스!!!아침에 말했잖아!!!”
“깜빡할 수도 있지. 다시 말해주면 되잖아. 오늘 오전에 환자가 좀 몰려서 바빴단 말이야.”
남편의 필살기, 이른바 마법의 문구 “환자가 몰렸다”가 나왔다. 남편이 환자가 몰려서 바빴다고 하면 김 여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는 김 여사가 당부했던 걸 잊어도 오케이, 김 여사의 중요한 연락을 놓쳐도 오케이가 된다. 환자가 몰렸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잠깐 기다려. 보톡스랑 가져올게.”
김 여사는 6개월에 한 번씩 노화 방지 차원에서 남편에게 보톡스를 맞았다. 맞을 때는 따끔하지만 그 팽팽해지는 느낌에 김 여사는 보톡스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거 맞았으니까 이삼일은 금주해”
“아…나 목,금 약속인데 괜찮으려나? 술 마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누구 만나는데?“
“나 서울 친구들“
“…진짜 만나? 걔네랑 약속 잡으면 매번 파투나잖아.”
그랬다… 김 여사가 이번 서울 나들이를 기대하면서 서울에 오긴 했지만 맘 속 한 켠에는 작은 불안감이 맴돌고 있었다. 바로 약속이 취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 여사의 친구들도 김 여사처럼 육아하는 입장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이슈들로
갑작스럽게 약속이 취소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둘째가 있거나, 워킹맘인 친구들의
경우 그 확률은 더 높아졌다.
김 여사는 친구들이 오랜만에 생파를 해주겠다는 말에 너무 설레 애써 불안감을 감추고 있었지만, 사실 내일과 모레의 약속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었다. 한 명이라도 나오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목요일 약속 당일, 보톡스를 맞아 팽팽해진 이마로 김 여사는 아침을 맞이했다. 간만에 서울에 온 김 여사는 어젯밤 남편과 배달어플로 야식을 푸짐하게 시켜먹었다. 제주에서는 꿈도 못 꿀 호사였다.
김 여사는 이렇게 배달 어플로 안 되는 게 더 많은 제주에 살다가 모든 게 다 되는 마법
같은 서울에 올 때마다 느꼈다. 챙길 것 많고, 들릴 데 많아 한숨 돌릴 틈도 없는 서울 방문이어도 “진짜 서울이 최고고 서울 만세다!!“라고 외쳤다. 보톡스 효과인지, 어젯밤 야식으로 먹은 족발의 콜라겐 덕분인지 김 여사의 얼굴에는 차르르 윤기가 돌았다.
지잉
휴대폰을 확인한 김 여사는 이른 아침부터 친구들 단톡방에 톡이 여러 개 와있는 걸 확인했다.
<미안, 연주야. 나 내일 아침에 급하게 출장이 잡혀서 오늘 밤에 못 나갈 거 같아>
<엇, 나도 오늘 둘째가 갑자기 열이 심해서 어린이집도 못 갔어. 나도 못 나갈 듯ㅜㅜ>
반지르르 팽팽했던 이마가 찌푸려졌다. 남편의 말이 씨가 된 걸까. 순식간에 오늘 만나기로 했던 두 명이 참석 불가를 통보하며 오늘 약속은 파투나 버리고 말았다. 김 여사는 힘이 빠졌다.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담에 서울 오면 보자>
김 여사는 톡방에 괜찮다고 했지만, 서운한 맘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가끔씩 톡방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끼리 번개했다며 사진을 톡방에 올리면 그게 그렇게 부럽고 서운할 수 없었다. 자신만 혼자 제주에 덩그러니 남겨져 발이 묶여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센치해졌다. 어떤 날에는 번개 사진을 보고 조슈아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김 여사가 기다렸던 오늘, 왜 약속이 파투인 걸까.
그 다음날, 두번째 만남이 약속됐던 그 날의 모임은 다행히 취소되지 않았다. 그 약속은 브런치 모임이었다. 아이들이 영어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시한부로 두 시간 동안만 짧게 보는 만남이었다. 김 여사를 포함한 셋은 청담의 한 브런치 카페에서 만났다.
매일 자연에 둘러싸인 채, 고즈넉한 생활을 이어오던 김 여사는 오랜만에 청담처럼 핫한 곳에 오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셋은 육아 이야기,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그래서 유준이는 미국 대학에 가는 거야?“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있던 친구가 김 여사에게 물었다.
“모르지. 아직 멀었잖아 초등학생인데. 미국은 근데 너무 비싸. 그리고 미국 대학 졸업해도 거기서 취업하기도 너무 힘들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유준이는 그래도 영어는 완벽하잖아. 그럼 됐지 뭐.”
“완벽하진 않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또래에 비해 국어가 진짜 많이 떨어져.”
“유준이한테 국어가 왜 필요해? 국어, 뭣이 중헌디!!!”
“그러니까! 유준이한테 국어가 뭣이 중헌디!!!”
친구들이 김 여사를 보며 웃었다.
“그래도…혹시 모르잖아. 한국에 있는 대학 갈 수도 있는 거고.”
“한국 대학? 유준이가?”
“응. 우린 애도 하난데 너무 멀리 있는 것보단 한국에 있는 게 뭔가 정서상으로도 좋을 거 같고…”
순간, 깔깔대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친구 하나가 정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여기 파이까지 뺏으려고는 하지 마. 너무 이기적이야.”
“…응?”
김 여사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친구는 김 여사를 보며 말했다.
“유준이처럼 국제학교 나온 애들은 영어가 완벽하잖아. 여기서 대치동 뺑뺑이 돌리며 영어 진짜 힘들게 공부한 애들은 진짜 죽어라 해도 환경적인 제약 때문에 그렇게까지 영어 하기 힘든데…여기 한국에서 대학 갈 애들 자리까지 뻇으려 하면 안 되지. 그건 남겨놔 줘라.”
“맞아. 이기적이네 김연주~~”
친구들의 이야기에 김 여사는 머리를 한 대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김 여사의 아들과 친구들의 아이들은 학년도 다를 뿐더러, 앞으로 한국에서 대학을 가더라도 지원할 학과 자체가 다를 확률이 높았다. 김 여사가 말한 것처럼 국제학교 애들은 대치동이든, 서울에서 공부한 애들보다 국어가 훨씬 약하니까. 김 여사가 말했던 조슈아가 노려볼 만한 한국 대학교들은 국제학부처럼 영어를 기반으로 한 학과들이었는데, 그런 것마저 그렇게나 경계가 되는 걸까.
김 여사는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 시간이 즐거웠던 게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유치원 하원 시간이 다가오자 김 여사와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찜찜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조슈아를 데리고 친정과 시댁을 돈 후, 제주로 돌아가기 전 날, 다시 한 번 집 청소를 했다. 이제 가면 또 다음 방학 때나 올 것이기에 그 때까지 김 여사의 집은 다시 또 먼지들의 소굴이 될 것이기에… 마지막 의식처럼 집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드디어 서울에서의 빡빡한 일정이 끝났다. 김 여사는 여러모로 힘들었던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제주로 내려오는 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김포 공항에서 수화물을 부치고 드디어 제주행 비행기 좌석에 착석했을 때 마음이 평온해지고 머릿속의 잡념들이 모두 사라지는 듯 했다. 제주행 비행기가 이륙해 육지와 서서히 멀어지자 마음은 점점 더 편안해졌다.
좌석 옆 동그란 창 밖으로 점점 아득해지는 서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 여사는 생각했다.
‘잘 있어라 서울아. 당분간은 보지 말자. 나한테는 배달 안 돼도 아무도 없이 조용한 제주가 역시 딱이야‘
※ 이 시리즈는 병원 운영, 초등학생 육아, 국제학교 생 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라이프스타일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은 하이퍼 리얼리즘 픽션입니다.
남의 집 얘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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