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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에게 배신당한 날

국제학교 보내는, 서울 20억 자가, 병원장 사모님 미쎄쓰 킴!

by 유리


지잉 지잉 지잉

금요일은 학교에서 알림 문자가 쏟아지는 날이다.

우선 다음 주 전반에 걸쳐 필요한 준비물이나 특이사항, 숙제에 대한 알림이 오고, 주말 지나고 당장 월요일에 필요한 사항에 대한 알림이 오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 문자가 폭탄 수준으로 쏟아졌다.

‘다음주는 또 무슨 알림이 있으려나~~ 한 번 보오오자~~ 보자~~~’

김 여사는 문자로 온 학교의 알림들을 꼼꼼히 복사하기 시작했다. 모두 영어로 오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복사해 파파고 번역기에 돌려야 두 번, 세 번 문자와 파파고를 왔다갔다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아, 다음주에 수영 수업 시작하네. 학교 수영복 서랍에서 찾아놔야겠다. 보자~보자~ 오 다음주에 학교에서 Book Fair 하네? 이번에도 괜찮은 책 많이 들어오려나? 저번에는 순 쓸데 없는 그림책이랑 보드게임만 사와서 돈만 버렸는데. 조슈아한테 제대로 된 책 좀 사오라고 말해놔야겠다. 음…그리고 음악시간에…엥? 이게 왜?’

파파고에서 번역된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던 김 여사는 순간 의아함에 휩싸였다.

“조슈아! 조슈아! 이리로 와 봐!“

하교 후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있던 조슈아는 김 여사의 부름에 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유! 물을 닦고 왔어야지! 바닥에 다 흘렸잖아!“

“엄마가 불러서 수건 안 닦고 왔잖아.“

“어유, 평소에는 그렇게 엄마 말 잘 들었어 네가?“

“그럼요~~~~~엄마님~~~~~근데 왜 불렀어요~~~~“

물이 흥건한 손을 김 여사의 옷에 비비며 조슈아가 물었다.

“아, 맞다! 내가 뭐 때문에 불렀더라?“

김 여사가 파파고 어플에 번역된 내용을 다시 쭉 훑어 보고 조슈아에게 물었다.

“아! 그래! 너 음악 시간에 녹음기를 왜 가져오래?“

“녹음기?“

“응. 여기 봐봐.“




김 여사는 파파고 어플에 번역된 내용을 조슈아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학기 말 있을 음악 공연을 위해 학교에서 연습을 시작했다며 모두 집에서 녹음기를 가져오라는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어? 진짜네?“

조슈아는 내용을 대충 보더니 흥미 없다는 듯 김 여사에게 말했다.

“이게 왜 필요해? 선생님이 뭐 때문에 가져오라는 이야기는 안 했어?“

“응. 그냥 음악 선생님이 공연 연습 다음주부터 한다고만 말했어.”

“흠….아! 그럼 너네 각자 연습한 파트 녹음기로 녹음해서 들어보고 부족한 부분 더 연습하라고 가져오라는 건가?”

“그건가 보네!! 엄마 천재!!!!”

조슈아는 김 여사에게 엄지 두 개를 척 올리더니 곧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김 여사는 갑자기 생긴 준비물에 휴대폰에서 쿠팡 어플을 열어 뒤지기 시작했다.

‘나름 학교에서 쿠팡 배송 올 시간 벌어주려고 미리 말했나 보네. 화요일에 필요한 거니까 오늘 주문하면 딱 주말 동안 오겠네.“

제주에서는 새벽 배송 쿠팡도 이틀이 걸린다. (섬 생활의 단점이다!) 그래서 주문할 때, 꼭 이게 언제 필요한 건지를 잘 계산하고 해야 한다. 서울에서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하루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주문했다가는 당장 내일 아이를 준비물 없이 학교에 보내게 될 수도 있다. 김 여사는 나름 학교에서 미리 준비물을 가져올 수 있게끔 미리 알려준 것에 센스있다고 생각했다.

‘좀…센스 있었네 학교. 그렇다면 센스 있는 나도 바로 주문해서 미리 준비해 놓는 센스를 발휘해야지!‘

김 여사는 망설임 없이 쿠팡에서 녹음기를 검색했다.

가격대가 아주 다양해서 김 여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학교에서만 쓰고, 일상에서는 거의 쓸 일 없는 녹음기이기에 굳이 비싼 걸 살 이유는 없어 보였다.

‘녹음기….조슈아가 학교에서 쓰고 나면 쓸 일이 없겠지? 좀 아깝긴 하네…뭐 내가 학부모 상담 준비할 때 영어 문장 녹음해놓고 외우면서 연습이나 할까?’

김 여사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적당한 가격대의 녹음기 하나를 골라 결제했다. 혹시 모를, 나중에 쓸 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너무 싼 걸 샀다가는 일회용품 마냥 한 번 쓰고 고장이 나버릴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다음에 또 쓸 일이 있을 때(이번에 음악시간에 가져오라고 했으니, 내년 음악 시간에도 공연 준비 때 가져오라고 할 수 있으니까!) 다시 구매하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김 여사는 너무 비싸지도, 너무 싸지도 않은 중간 가격대의 녹음기를 구매한 것이다.

‘역시, 나 자신! 똑똑해! 센스 넘쳐!’



#

주말에 내려온 김 여사의 남편이 조슈아와 원카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 여사는 오랜 만에 조슈아에게서 벗어나 침대에 누워 스탠바이미로 밀린 드라마를 보고 정주행하고 있었다.

지잉

문자를 확인한 김 여사가 남편에게 외쳤다.

“오빠! 문 밖에 쿠팡 왔대! 안에 좀 들여놔줘!”

“또 뭘 산 거야?”

“내 것 산 거 아니야! 조슈아 준비물로 녹음기 산 거 온 거거든!”

“녹음기? 아날로그식이네? 아이패드로 녹음하면 될 텐데? (국제학교에서는 아이패드를 필수로 구매해 각자 하나씩 쓰고 있다)”

“아이패드 계속 보고 있으면 눈 나빠지고 그러니까…그리고 애들이 아이패드로 순순히 녹음만 하고 있겠어?”

“하긴, 그러네! 여기 식탁 위에 올려놨다!”

#

음악 수업이 있는 화요일 아침, 김 여사는 잊지 않고 조슈아의 책가방에 녹음기를 넣어줬다.

“조슈아! 너 가방 아무데나 던져 놓으면 녹음기 고장나거나 깨질 수도 있어! 오늘 가방 던지면 안 돼! 알았어?”

“알겠어~”

김 여사가 정성스레 닦아 놓은 블루베리와 토끼 모양으로 귀엽게 깎아 놓은 사과를 모래 씹는 표정으로 꾸역꾸역 먹고 있던 조슈아가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슈아!!! 엄마 말 들었지!!”

“들었어!! 가방 안 던질게!!”

김 여사는 여전히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조슈아를 보며 한숨지었다.

‘어휴…진짜 쟤는 엄마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 날, 하루종일 조슈아가 먹을 미역국에, 멸치볶음에, 메추리알장조림을 하며 불 앞에 서 있던 김 여사는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아휴, 힘들어! 좀 쉬자!!”

김 여사가 털썩 소파에 쓰러지듯 앉는데, 띠띠띠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도 못 쉬었는데 벌써 조슈아가 하교할 시간이었다.

“왔어?”

김 여사가 조슈아를 맞이하러 신발장으로 들어서는데, 조슈아가 씩씩대며 김 여사에게 말했다.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에?? 뭐!!”

하루종일 조슈아가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불 앞에 서 있었던 김 여사는 조슈아가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탓하자 울컥 화가 올라왔다. 다리도 아프고, 모공이 열릴 정도로 불 앞에 서 있었는데 왜 자신을 탓하는 건가!

“엄마 때문에 오늘 음악 시간에 완전 창피 당했잖아!!!!”

“왜?!!! 엄마가 준비물도 다 챙겨줬구만!!! 아침에 엄마가 녹음기 깨지니까 가방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가방 던졌어? 녹음기 깨졌어 설마!!!!!”

김 여사는 흥분하면 조슈아를 채근했다. 그러자 조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김 여사를 쳐다보았다.

“엄마….녹음기가 아니라 리코더였어 준비물….”

“….뭐?”

“녹음기가 아니라 리코더였다고!!!!!!엄마 바보야!!!!”

김 여사는 머리가 댕 망치를 맞은 듯 했다.



그렇다….Recorder는 녹음기도 되고, 리코더도 됐다.

‘리코더 스펠도 recorder였구나….하하…하하….하하…어쩐지 이상하더라….하하 ‘

영어 원문은 읽지도 않고, 죄다 복사해서 파파고에 번역을 돌리기만 하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김 여사는 조슈아에게 할 말이 없었다.

“엄마가 쿠팡으로 리코더 다시 주문해 줄게….”

“엄마 천재 취소!! 엄마 바보!! 파파고 금지야!! 엄마 파파고 금지!!!!”

“…..”

김 여사가 제주 생활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었던 절친 파파고에게 아주 세게 배신당한 날이었다.

“조슈아…”

“왜?!!”

아직도 화가 안 풀린 조슈아가 씩씩대며 김 여사에게 말했다.

“오늘 너 좋아하는 교촌치킨 시켜줄 테니까…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주라.”




김 여사는 조슈아에게 먹이기 위해 오늘 하루종일 준비했던 음식들을 쓱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음식들을 뒤로 하고 그녀는 배달 어플에서 교촌 치킨을 주문했다.



그리고…네이버에 접속해 검색했다.

‘제주 영어도시 성인 영어학원’

‘서귀포 성인 영단어 학원‘

‘성인 영단어책’



※ 이 시리즈는 병원 운영, 초등학생 육아, 국제학교 생 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라이프스타일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은 하이퍼 리얼리즘 픽션입니다.


남의 집 얘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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