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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국제학교 보내는, 서울 20억 자가, 병원장 사모님 미쎄쓰 킴!

by 유리

“요즘 대니얼, 잘 지내죠? 별 일은 없으세요?”

“네..뭐. 조슈아 어머님도 잘 지내시죠?”

“네. 저번에 학교 페스티벌 할 때 대니얼 부스도 가봤었는데 진짜 잘 꾸며놨더라고요. 대니얼이 탕후루도 직접 만들었다고 소개해줬는데…정말 대단해요. 엄마들 보면 인사도 잘 하고, 친구들하고도 잘 지내고…대니얼은 진짜 모범생이에요.”

“아…아니에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

김 여사는 그녀의 짝짝이 벤츠를 타고 집에 오는 길 내내 아까 티타임에서 대니얼 엄마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오늘 김 여사는 학교에서 작은 행사 후 마주친 몇몇 엄마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 대니얼 엄마도 참석했는데, 김 여사는 모인 엄마들 중 그나마 가장 친분이 있던 대니얼 엄마에게 계속 안부도 묻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대니얼 엄마의 태도가 왜인지 예전보다 자신에게 차가워진 듯 했다. 김 여사는 모임 내내 그게 못내 신경쓰였다.

‘내가 뭐…잘못한 거 있나?‘

대니얼 엄마는 김 여사의 몇 안 되는 국제학교 지인들 중 하나였는데 그나마 그녀와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니얼이 조슈아와 1학년, 3학년 그리고 4학년인 현재까지 세 번이나 같은 반을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김 여사는 학교 행사에서나, 학부모 모임에서 다른 엄마들보다 대니얼 엄마와 마주칠 기회가 많아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덕에 대니얼 엄마와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꽤 있었다. 대니얼 엄마는, 지금은 조금 어색해졌지만 한때 그녀와 상당히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티모시 엄마와 골프 모임 등을 같이 하고 있어서 만났을 때 할 이야기 주제도 다른 엄마들에 비해 꽤 많았다. 그래서 그녀와 담임 선생님 얘기, 반에서 남자애들끼리 있던 얘기, 예전 반 아이들 얘기, 티모시 엄마 얘기 등을 하면 그럭저럭 어색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김 여사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아 김 여사는 속이 탔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계속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문제인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조슈아가 대니얼이랑 싸웠나? 무슨 문제 있었나?’

김 여사는 그날 하교한 조슈아에게 물었다.

“조슈아, 혹시 대니얼이랑 요즘 싸웠어?”

“나? 왜?”

“아니…그냥. 혹시 싸웠어?”

“아니. 안 싸웠어. 걔랑은 그냥 친하지도 않고, 안 친하지도 않고, 그룹 워크할 때만 얘기하는데?”

“아…그래?”

“응! 나 안 싸웠어! 왜? 대니얼이 나랑 싸웠대?”

“아니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뭐야. 갑자기. 나 대니얼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 싸우지도 않았다?”

“응. 우리 아들 잘했어 잘했어. 들어가서 숙제 해. 엄마 저녁 준비 할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는 듯 캐묻는 조슈아를 황급히 방으로 들여보내고 김 여사는 부엌으로 갔다. 오전에 양념에 충분히 재놨던 불고깃감을 프라이팬에 올려 구우면서 김 여사는 계속 생각했다.

‘그러면 뭐지…? 진짜 내가 뭐 잘못했나?

대니얼 엄마는 집에만 있는 자신과 달리,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모임도 많고 아는 지인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녀와 척을 지게 되면, 안 그래도 고립되고 조심스러운 국제학교 커뮤니티에서 지금보다 자신이 더 소외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김 여사는 그 점 때문에 아까부터 계속 마음이 찜찜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자신이 엄마들 사이에서 소외되면, 혹시 조슈아의 친구 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싶어져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엄마!!!! 탄내 나!!! 불났어?”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미안. 불난 거 아니야!! 엄마가 잠깐 딴 생각했어!! 금방 다시 해줄게!”

“에이, 나 배고픈데!! 빨리 해줘 불고기!”

김 여사는 대니얼 엄마 생각에 사로잡혀 그만 프라이팬에 올려둔 불고기를 태워먹고 말았다. 그녀는 프라이팬에 잔뜩 눌어붙은 불고기 양념을 실리콘 주걱으로 박박 긁어내고는 얼른 새 불고깃감을 꺼내 굽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조슈아의 수학과 국어 공부를 봐주는 동안에도 김 여사는 영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상은 이미 그녀가 힘겹게 버티고 있던 국제학교 엄마들 커뮤니티에서 튕겨져 나가 조슈아까지 힘든 학교 생활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상상만으로도 김 여사는 풀이 죽어 기분이 훅 다운돼 버렸다.

오늘 할 일을 마치고 조슈아는 조슈아 방에서, 김 여사는 김 여사 방에서 각자 쉬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셨나 우리 여보?”

“…그냥 뭐…”

“엥? 목소리가 왜 그래? 조슈아 학교에서 또 뭔 일 있었어?”

“아니…내가…”

“당신이? 무슨 일이었는데?”

“아니…들어봐 오빠.”

김 여사는 남편에게 낮에 티타임에서 대니얼 엄마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오빠, 내가 오빠한테 말하면서 생각났는데… 엊그제도 내가 슈퍼 갔다가 대니얼 엄마를 봤거든? 내가 그래서 진짜 밝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했는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네 안녕하세요“ 하고 그냥 지나갔었어. 맞아. 그런 일도 있었네! 진짜 나한테 뭐 화났나봐.”

“그런데 여보가 그 사람하고 만나거나, 따로 연락한 적도 없는데 여보한테 화날 일이 뭐가 있어?”

“…그러니까…그러니까 내가 이상하다는 거야. 오늘 하루종일 생각해봐도 도무지 뭐 때문에 그런지 알 수가 없어.”

“그냥, 그 사람이 요즘 좀 힘들거나 기운이 없었나 보지. 별 생각 없이 대한 것 같은데?”

“아니야! 뭔가 예전이랑 미묘하게 분명 태도가 달랐다니까? 목소리랑 톤이랑 표정이랑 그런 게…”

“에이, 여보 그 사람은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신경써서 여보 대하지 않았을 거야. 그냥 그날따라 기운이 없었거나, 요즘 환절기라 감기라도 걸려서 몸이 좀 안 좋았나보지. 여보랑 만난 적도 없는데 여보한테 화날 일이 뭐 있어?“

“몰라 나도.“

김 여사는 자신도 도저히 영문을 몰라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유준이랑은 확실히 아무 일 없는 거 맞고?”

“응. 일단은 조슈아한테 물어봤는데 걔랑 같이 놀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라서 뭐 말도 거의 안 하는 거 같더라고. 둘이 애초에 안 부딪히는데 당연히 아무 일도 없지 않을까?”

“여보가 지금 정답을 말했네. 여보도 그 엄마랑 애초에 안 부딪히는데 당연히 아무 일도 없겠지.”

남편 말이 맞았다. 애초에 만나거나 연락한 적도 없는 대니얼 엄마가 자신에게 화나거나 기분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건….맞네. 그냥 난…그 엄마가…티모시 엄마하고도 좀 친하고 이렇다 보니까…내가 요즘 티모시 엄마랑 좀 어색하잖아. 그러니까 혹시 나쁜 얘기를 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대니얼 엄마는 여보랑 아예 친해질 자격도 없는 사람 같은데? 픽업 부탁 수차례 해서 오히려 찔릴 구석이 있는 티모시 엄마가 그 엄마한테 여보에 대한 나쁜 말 전했을 거 같지도 않지만…만약에 그런 말을 전했고, 그거 때문에 대니얼 엄마가 여보한테 차갑게 대하는 거라면 그 엄마랑 여보는 아예 친해질 가치도 없는 거야. 신경쓰지 마.”

“…그런데 그 엄마가 아는 사람도 많고 하다 보니까…내가 안 그래도 아는 사람 없는데 나 혼자 너무 소외될까봐…좀 겁나고 신경쓰이고 그랬나봐.”

남편에게 아주 솔직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고 나니, 김 여사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부끄러워졌다. 이건 자신이 10대 시절 여중을 다닐 때나 고민했던 친구들끼리 편 가르기, 이간질 뭐 그런 거 아닌가. 김 여사는 40이 되어서까지 이런 감정을 느끼며 불편해야 한다는 게 창피하고 한편으로는 한심스러웠다. 이 나이 먹도록 이런 인간관계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 하는 자신이.

“여자들 세계는 어렵네.“

“응. 어려워. 내가 이런 여자들 세계를 쭉 살았다. 여중 여고 여대에 엄마들 사회까지.“

“그럼 적응 좀 해봐 여보도 이제 적응할 때 됐네ㅋㅋㅋ“

“해도해도 힘든 걸 어떡해!! 그리고 엄마들 세계는 내 아이와 바로 직결되니까 더 조심스럽고 힘들다고.“

“그렇지. 그런데 여보. 누가 나한테 행동할 때 그 이면에 다른 의도까지 생각하려 하지 말고, 그 표면만 생각해봐. 여보는 매번 그 사람의 이면에 이런 생각이 있을 거다 이런 거까지 생각하니까 오늘처럼 스트레스 받고 혼자 기분 처지고 힘들잖아. 아마 정작 대니얼 엄마는 아무 생각 없을 걸?“

“…“

김 여사가 대꾸 없이 듣고만 있자, 남편이 말을 이어갔다.

“여보, 객관적으로 생각해봐. 대니얼 엄마가 한 말들, 그 자체는 여보한테 전혀 날 서지 않고 오히려 예의 있었어. 감사합니다. 네.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이런 거 워딩 자체는 예의있잖아. 정말 그 사람은 아무 의도 없이 말한 걸거야. 그냥 좀 피곤하고, 힘들었나보지 여보 만났을 때. 여보는 누가 여보의 선 넘는 것도 싫어하지만, 여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선 넘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조심하는 스타일이라 다른 사람한테 미움 살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 좀 친해지기 힘들고, 거리감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렇게 신경쓰이면 여보가 먼저 대니얼 엄마한테 차라도 마시자고 연락해봐. 의외로 좋아할 지도?“

“…내가? 먼저?“

“응. 여보는 절대 남들한테 먼저 뭐 하자고 안 하지? 그러면 실수할 일이 없으니까 아무일도 안 생기지만, 가까워지는 사람도 없어서 외롭잖아. 그나마 좀 친했던 아론 엄마도 이제 곧 서울 간다며. 나는 병원 때문에 평일에는 제주 못 내려가고. 여보도 제주 안에서 여보 만의 터전을 한 번 용기내서 꾸려봐. 다들 생각보다 좋아할 거야.“

“…정말?…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응! 그렇다니까? 여보는 누가 미워할 사람이 아니야. 애초에 아무 짓도 안 하잖아ㅋㅋㅋ아무 짓도 안 저지르니까 아무 감정도 없을 거야 여보한테.“

김 여사는 남편의 말에 자신을 돌아봤다. 학창시절부터 누군가한테 실수하고, 욕 먹고 싶지 않아서 항상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켰던 나날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누구와 가까워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고, 대부분은 그 시간을 충족시키지 못 해 그녀와 멀어지고 그녀에게서 떠나갔다.

김 여사가 안방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8시 30분. 아직 많이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많이 늦지는 않았는데…이 시간에 연락해봐도 될까? 정말….내가 먼저 한 번 보자고 보내도…안 싫어할까?’

김 여사는 남편이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생각하며 눈 딱 감고 휴대폰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대니얼 어머님. 오늘 봬서 반가웠어요. 이번주에 저희 브런치나 한 번 할까요? 시간 괜찮으세요?>

차마 전송 버튼은 누르지 못 하고, 망설이던 김 여사. 갑자기 그녀의 눈 앞에 제주에서의 여러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필드 나갈 사람이 없어서 라운딩은 나가보지도 못 한 채, 골프 시즌을 마무리했던 나날, 학교 행사에 갔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수다 떠는 엄마들 틈에 멀뚱멀뚱 서 있던 나날…

‘용기…내 보자! 앞으로 제주에서 보낼 나날이 구만 리인데… 오빠 말대로 내 터전을 천천히 꾸려 나가보자‘

용기내 전송 버튼을 누른 김 여사는 민망함과 창피함, 그리고 문자가 안 오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불안감에 차마 휴대폰을 볼 수 없어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두고는 안방을 나와 버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일부러 웃긴 예능을 틀고 바라봤지만, 내용이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김 여사의 마음 안에서 자조적인 씁쓸함이 올라왔다.

‘뭐하냐. 40이나 돼가지고. 나 무슨 썸타는 거야? 나 무슨 여중생이야?ㅋㅋㅋ’

스스로 한심해진 그녀는 용기내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 휴대폰을 들었다. 차마 액정은 보지 못 하고 거꾸로 든 채였다.

‘볼까? 답장 안 왔으면 어떻게 해? 아니, 그것보다 거절했으면 어떻게 해? 진짜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거 같은데…괜히 보냈어!! 내가 미쳤지!!! 지금까지처럼 아무 일도 안 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건데!!!‘

그녀는 심호흡까지 하고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조슈아 엄마! 너무 좋죠! 이렇게 먼저 연락해줘서 진짜 고마워요! 제가 요새 몸살 기운 때문에 오늘 텐션이 영 별로였죠? 금요일쯤은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그때 볼까요? 너무 좋다!>

남편이 말한 그대로였다. 대니얼 엄마는 김 여사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고, 그저 그녀는 몸이 안 좋은 것뿐이었다. 마치 대니얼 엄마와 썸이라도 타는 것처럼 갑자기 설레진 그녀는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대니얼 엄마에게 그러자고 답장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아무 일도 안 하니까, 아무 일도 안 생겼는데…그러니까 혼자 너무 외롭고 힘들잖아! 두려워하지 말자! 엄마들도 똑같은 인간인 걸!


※ 이 시리즈는 병원 운영, 초등학생 육아, 국제학교 생 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라이프스타일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은 하이퍼 리얼리즘 픽션입니다.


남의 집 얘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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