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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r 19. 2024

18. 삶의 가고 멈춤을 느껴보자

'평범'의 진리를 헤아리며 (3)

※ 이 글은 <17. 울타리 아래 국화꽃 한 송이>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은 그 글에서 제가 말하는 '도가道家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무엇인지 알아보신 다음, 계속해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습



1. 도교와 도가의 차이,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집착'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집착'은 무슨 뜻이라고 했죠? 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꼭 붙잡고 놓지 않는 행위'입니다. 소오생 버전으로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끝없이 매달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역시 '장생불사 長生不死', 늙지도 않고 오래오래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요? 그건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기에 매달리는 일은 '집착'입니다.


그런 식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에 집착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매달리는 것, 그게 바로 도교 마인드입니다. 누군가 설령 외형적으로는 기독교를 믿고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복을 달라, 돈 많이 벌게 해 달라, 오래오래 살고 가능하면 죽지도 않게 해 달라... 그런 기복祈福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참 종교인'이 아니라 그저 불가능한 욕망에 집착하는 도교 마인드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죠.


2. 도가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도가의 패러다임은 '무위자연 無爲自然'입니다. '무위 無爲'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집착에 사로잡힌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 그걸 어떻게 아느냐구요? 대자연을 보라는 거죠.


태양은 왜 빛날까요?

파도는 왜 밀려올까요?

새는 왜 노래할까요?

별은 왜 반짝일까요?

구름은 왜 흘러갈까요?


이유가 따로 없습니다. 대자연은 그저 '무심無心'할 뿐, 집착하는 마음도 없고, '무위 無爲', 집착에 사로잡힌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간이라는 존재도 대자연의 일부이므로, 마땅히 대자연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위자연 無爲自然'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전신傳神'이라는 단어, 기억하시나요? 중국문학에서 도연명 전원시田園詩의 특징을 일컬어서 부르는 말이었죠. 도연명이 전원시를 통해 '전할 전傳', '정신 신神', 즉 대자연의 '무위자연 無爲自然'이라는 정신/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조심! 과거 많은 학자들은 '무위 無爲'의 도가 사상을 아주 소극적으로 해석했는데요, 요새는 정 반대로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로 해석한답니다. 즉 '무위 無爲'내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라는 거죠.




자,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했던 얘기였죠? ^^;;

그리고 제가 어떻게 마무리를 했죠? 전편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집착'인 것일까요? 그 경계선을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그 경계선을 깨닫는 것은 일종의 싯단타siddhānta의 경지입니다. 그런 경지는 논리적인 말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깨닫는 방법은 두 가지!

(1) 뼈저린 삶의 직접 경험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는 자증自證의 방법.

(2) 데샤나deśanā의 언어, 즉 문학 작품의 감상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방법.


하지만 두 가지 방법 어느 것도 반드시 깨닫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구도求道를 향한 당사자의 간절한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할 테니까요. 기도란 그럴 때 하는 것 아닐까요? 복을 달라고 떼를 쓰는 위아爲我의 기도가 아니라, 청정 상태의 마음을 얻으려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오늘의 작품을 감상해 보시겠습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시는 <귀거래사 歸去來辭>라는 작품입니다. 잠깐 작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볼까요?




도연명陶淵明(365~427). 자字는 원량元亮,호號는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고 해서 오류선생五柳先生. 은거 후에는 이름을 '잠潛'이라고 바꿨답니다. 잠수 탔다 이거죠.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호구지책(糊口之策; 입에 풀칠할 방책)으로  41살 때 벼슬길에 나섰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팽택彭澤이라는 작은 마을의 현령으로 부임한 거죠.


근데 겨우 80일 정도나 되었을까요? "닷 되 쌀을 위해서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 不爲五斗米折腰" 어느 날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에라잇, 때려 집어 치고 귀향을 했다는 이야기. 그때 지은 작품이 그 유명한 <귀거래사>랍니다. 왜 그렇게 유명할까요? 간단합니다. 노장사상, 도가 사상을 논리로 설명하자면 눈이 핑핑 #@.@# 아이고 골치 아파~ 그런데 데샤나의 문학은 어떻다구요? 그냥 <귀거래사>와 같은 작품을 즐겁게 감상하기만 하면, 아하~ '무위자연'이란 게 이런 이야기겠구나~ 온몸으로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주로 4.6. 변문체騈文體로 썼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와 산문의 중간 정도라는 이야기. 산문체로 쓴 서문도 있는데 위에서 제가 소개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서 그냥 건너뛰겠습니다. 그래도 전체 분량이 제법 깁니다. 한문 울렁증 증세가 있는 분도 계시고 하니... 인터넷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한문 원문도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부분에서는 원문도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주제 별로 네 단락으로 나누어 소개할게요. 자, 그러면 같이 감상해 보실까요?




#1. 멀리 가지 않았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전원田園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을 소냐?

歸去來兮,田園將蕪/胡不歸?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


스스로 마음을 육체의 노예로 삼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지난날의 잘못됨은 돌이킬 수 없는 것. 다가올 그날에는 만회하여 보리라!

길을 잃었으되 멀리 가지 않았으니, 지금 과거의 잘못을 깨달음이 옳으리라.

悟/已往之不諫,知/來者之可追。 實/迷途其未遠,覺/今是而昨非。

(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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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육체의 노예로 삼았다는 말이 아주 인상 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아마도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유가/ 도가/ 불가 사상을 막론하고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의 욕망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육체의 노예로 삼았다는 말은, 본능 충족의 차원을 넘어서서 욕망에 집착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욕망일까요? "닷 되 쌀을 위해서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 不爲五斗米折腰".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했음을 후회한다는 이야기죠. 돈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돌발 퀴즈!

공자는 돈과 명예를 좋아했을까요, 싫어했을까요?


부귀영화?

그게 내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수레를 모는 마부라도 하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富貴如可求, 雖執鞭之士, 吾亦爲之。如不可求, 從吾所好。" 『논어 · 술이述而』


아하, 공자도 돈과 명예를 좋아했군요. 하하, 사실 그런 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거기에 매달려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느니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과적으로 돈과 명예가 따라오면 좋은 것이고, 아니더라도 자기가 정말 하고픈 일을 하고 살았으니 그 아니 좋겠습니까? 그 이치를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갈림길은 '집착'에 있습니다.


공자는 또 말합니다. "길이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일을 도모하지 말아라! 道不同, 不相爲謀." 『논어 · 위령공』 "길이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한 마디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겠죠. 어떤 가치관을 말하는 걸까요? 공자의 판단은 아주 명쾌합니다.


[1]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가치관.

[2]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가치관.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제 필명은 소오생입니다. <작가 소개>에는 누군가 이렇게 적어놓았네요.

소오笑傲는 부귀공명을 뜬구름과 같이 생각하고 한번 코웃음으로 날려버린다는 뜻.




학생들은 또 "길을 잃었으되 멀리 가지 않았다"는 구절을 아주 좋아하더군요. 학생들은 도연명의 그 말을 듣고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근데 사실 배움의 길에 나선 사람이라면,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다 '학생' 아니겠어요? 도연명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누구든지 아직 늦지 않았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2. 어디로?


(2-1)

뱃전은 흔들흔들 경쾌하게 흔들리고,

바람은 산들산들 옷자락을 스치누나!

지나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자꾸나,

희미한 새벽빛이 아쉽기는 하더라도...


(2-2)

아아! 저어멀리 나의 집이 보이누나!

기뻐하며 달려가니 머슴들이 반기누나, 문 앞에 나와 노는 어린 자식 반기누나!

황폐한 뜨락에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남아있네.


(2-3)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안에 들어가니, 술잔에는 하나 가득 향기로운 국화주.

술잔을 기울여 혼자서 자작하며, 한가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뜨락의 나무를 바라본다.

남쪽 창문을 열고 맑은 정신 뿜어보니, 무릎 하나 들여놓을 이 작은 방의 안락함을 깨닫노라.

倚/南窗以寄傲,審/容膝之易安。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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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은 도연명이 길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어디긴 어디겠어, 당연히 자기 고향이겠지. 네, 그렇겠죠? 그런데 학생들이 (2-2)를 읽어보고 이상하다고 합니다. 아니, 찢어지게 가난하다더니, 웬 머슴? 웬 정원? 우와, 정원에 소나무도 있고 국화꽃도 있다구여? 쌤, 가난하단 말 순 가짓부렁 아녜요?


하하, 그렇죠? 아무리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땅값도 다르다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면 뭔가 쫌 있어 보이는 모습 같죠? 그러니까 <귀거래사>는 현상의 세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걸 염두에 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로역정 心路歷程'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할 것 같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우의寓意 소설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이 생각납니다.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후세에 미친 영향이 엄청 컸답니다.


남쪽 창문을 열고 맑은 정신 뿜어보니,

무릎 하나 들여놓을 이 작은 방의 안락함을 깨닫노라.

倚/南窗以寄傲,審/容膝之易安.


남으로 난 창문, 무릎 하나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작은 규모의 방. 그러니까 대충 한 평 정도나 될까요? 작가님들은 그런 집에 사신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행복하시려나요? ^^;; 그런데 그런 방이 후세 동아시아 선비들이 그리워했던 꿈의 모델하우스였다는 사실을 아시려나요? ^^


중국 역대 최고의 천재 문인은 북송 시대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의 평생 소원은 도연명처럼 '용안정 容安亭'을 짓고 사는 거였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작은 소원조차 이루지 못했죠. 미리 '무릎 하나 들여놓을 작은 방의 안락함 膝之易'이란 구절에서 한 글자씩 따서 방 이름까지 지어놓았건만 평생 여기저기 유배를 다니느라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혼자 20평 30평이나 되는 아파트를 차지하고 살면서, 울릉도 같은 고高 물가 지역을 여행할 때나 동파 같은 대문호가 그리워했던 그런 방에 머물다니, 무슨 공덕을 쌓았다고 이런 사치를 누리는 건지... 동아시아의 모든 선배 선비님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집니다. 죄송합니다아...

울릉도, 나의 용안정. 1.5평 크기였다.

많은 사람이 은퇴한 후 적당히 한적한 지방에 내려가서 전원주택에 살고 싶어 합니다. 작가님들은 앞으로 어떤 집에 살고 싶으신가요? 저는 김상용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나네요.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무릎 하나 들여놓을 정도의 작은 주거 공간.

남쪽으로 창문 하나 열면, 평범한 논밭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요, 진정한 유토피아다!

도연명의 세 번째 메시지 같군요.



#3-1. 임진자득의 삶 - 산책


매일처럼 뜨락을 산책하는 이 즐거움이여!

사립문은 달려있되 언제나 닫고 지낼진저.     

지팡이를 짚고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이따금 고개 들어 먼 곳도 바라보며...


구름은 무심히 골짜기를 나서는데, 피곤한 저녁 새는 돌아올 줄 아는구나!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어둑어둑 내려앉는 땅거미,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어슬렁 걸어본다.


돌아가자! 세상과의 교분을 끊어버리자!

세상과는 어긋나 있으니, 다시 수레를 몰고 나간단들 무엇을 얻을 손가?

-------------------

유토피아/무릉도원은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마음속에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무위자연의 정신이자, 임진자득 任眞自得의 경지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삶일까요? 여기 그 해답이 있습니다.


(1) 산책. 

지팡이도 등장하고, 땅거미도 나오네요? 무연고 작가님에게 말씀드렸던 지팡이 짚고 가시는 땅거미 할아버지 글감은 바로 여기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일백 번 소리 내어 읽으면서 열 번 써보시면 참 좋습니다. 옛날 동아시아의 산수화에 제시題詩로 자주 사용하던 구절입니다.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뜻은 위에 쓰여 있죠? 지난번 <술을 마시며 5. 飮酒五>에서도 나왔죠? 얼렁얼렁 가슴 깊이 새겨 놓으시길. 여기서 잠깐 엉뚱한(?) 에피소드 하나 소개합니다. 서울의 어느 유명한 여자대학에서 중문과 교수를 초빙할 있었던 실화랍니다.


학과에서 1등으로 추천한 임용대상자가 총장실에서 면접을 보는데... 총장님이 느닷없이 방에 걸려있는 글씨(한자로 된)를 가리키면서 하시는 '말쌈'이... 누가 나한테 선물로 준 글씨인데 저게 뭔 뜻이오? 궁금하니 설명 좀 해주시구려. 임용대상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도 뻥긋 못했다네요.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뻔할 뻔 자죠, 뭘. ㅋㅋㅋ


어떤 글귀가 쓰여 있었을까요? 딩동댕~ 바로 위의 저 12글자랍니다. 가운데 '이以'와 '이而'는 없어도 되는 접속사이므로 빼고 10글자로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지성인들이 옛날부터 즐겨 사용하는 구절들이 있는데요, 그걸 알면 선비로 대접해 주고 모르면 인간 취급도 안 했다는 이야기. 선비가 되느냐 못 되느냐, 교수가 되느냐 못 되느냐. 오늘날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어쩌자구요?


결론: 소오생이 알려주는 이런 구절은 아무리 바빠도 일백 번 읽고 써서 꼭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그러면 피가 되고 살이 되며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게 됩니다. 뽀너스로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근데 사실 그런 구절은 별로 많지 않답니다. 종종 알려드릴 테니, 사자성어 공부한다 생각하고 100개 정도만 외워놓으시길. 삶의 인연이 닿으면 정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리더 그룹을 만날 때 써먹으면, 중국과의 모든 일이 만사형통합니다. 만사? 만사萬事까지는 아니고... 9999사事 형통할 게 틀림없습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처음 만난 그 순간에 도원에서 결의하고 의형제를 맺은 것, 다 아시는 이야기잖아요.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합니다. 대자연은 집착이 없습니다.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새는 날기가 피곤해지면 둥지로 돌아올 줄 압니다. 배고파도 더 이상 먹고살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도연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네 번째 대자연의 메시지입니다.


(2) 닫은 사립문.

욕망과 집착의 문을 닫았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혹시라도 "세상과의 교분을 끊어버리자"는 말을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의 '세상'이란 '욕망과 집착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요.



#3-2. 임진자득의 삶 - 브런치 열화당


 친지들과 다정한 이야기 나눔을 기뻐하고,

거문고 뜯고 책 읽으며 근심을 덜어본다.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열/친척/지정화, 낙/금서/이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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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여기서 강릉 선교장의 '열화당' 이름이 나왔다고 말씀드렸죠? <12. 누구든지 아무 때나 어서 오세요> 저는 여러 작가님들이 이 브런치스토리 글방에서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때로는 동영상도 올리며, 댓글로 오순도순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정말 정말 정말 참 좋습니다.


도연명은 말합니다. 여기가 바로 열화당이요, 무릉도원이며, 유토피아다! 다섯 번째 메시지입니다.



#3-3. 임진자득의 삶 - 쿵따리 샤바라


농사꾼이 봄이 왔다 시절을 알려주니, 이제 곧 서쪽 뜰에 할 일이 있겠구나!     

때로는 수레도 몰아보고, 때로는 돛단배도 저어 본다.

심산유곡 그윽한 골짜기도 찾아보고, 울퉁불퉁 험준한 산길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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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는 이야깃거리가 세 가지 있습니다. "농사꾼이 봄이 왔다 시절을 알려주니, 이제 곧 서쪽 뜰에 할 일이 있겠구나!" 첫째는,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도가의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기 직면하고 있는 현실 속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매우 적극적 행위임을 알려줍니다.


둘째. 지난번 <17. 울타리 아래 국화꽃 한 송이>에서, 빛따라 작가님이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선 그 경계에서는 술을 통해야만 하는지(제목을 보면요 ㅎㅎ), 그래서 자연에 취하듯 술에도 취한다 하는지... 문득 술에 늘 취해있는 친구가 떠오릅니다.


아주 예리한 질문입니다. 소오생의 글 20편을 쭈욱~ 따라 읽어보신 작가님들이면 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제목/이름'을 아주 중시한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의 제목도 놓칠 수 없었지요. 언제 말씀드릴까 했는데, 예리하게 짚어주셨네요. 역시 강호에는 고수가 산너머 산입니다.


자, 지난번 글에서 소개한 시의 제목을 다시 보실까요? <술을 마시며 5>. 원래 제목은 <음주 飮酒五>. 음주 운전을 하듯 음주 창작을 했다는 이야기. 그것도 연작시네요. 모두 20편을 지었다니 술 깨나 마셨겠군요.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요? 뭐 참고서에 정답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제멋대로 추측해 봅니다. 전에 <삶은 '우연'인가 '필연'인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 필자의 경험을 말씀드리겠다. 때로 학생들은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설명해 주는 내가 제법 의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늘 웃으며 행복하실 수 있나요? 묘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아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나도 여러분과 똑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전히 힘들고 아프다. 그래서 이 강의의 내용을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들려주며, 그때마다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거다... 그렇게 고백했다.


도연명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힘들고 아픈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술 한 잔 마시면서 벽에 걸어놓은 자신의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동아시아의 '학문'은 '실천'을 중요시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겠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그걸 바로 자신의 삶에 100%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에서부터 강조합니다.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 머리로 배웠으면 온몸으로 익히라고 합니다. "불역열호 不亦說乎!"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라고 타이릅니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배운 대로 실천하라고 강조합니다.




동아시아의 글쓰기는 글재주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배운 대로 실천하기 위해 늘 자신을 달래고 타이르고 응원하고 격려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도연명도 그랬던 모양이죠?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술도 마셨지만, 또 다른 형태의 산책도 즐겼답니다.


때로는 수레도 몰아보고, 때로는 돛단배도 저어 본다.

심산유곡 그윽한 골짜기도 찾아보고, 울퉁불퉁 험준한 산길도 걸어본다.


드라이브도 하고, 배도 타보고, 깊은 산도 올라가 보네요. 하하, 저랑 다를 것 하나도 없군요. 저는 이 구절을 대하면 언제나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 노래가 생각난답니다. 가사 일부만 옮겨볼게요.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산으로 올라가 소리 한번 질러봐

나처럼 이렇게 가슴을 펴고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중략)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땐 하던 일을 멈추고

여행을 떠나가 바다를 찾아가 소릴 질러봐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중략)  


우울한 날이 계속 이어질 땐 신나는 음악에 신나게 춤을 춰봐

나처럼 이렇게 리듬에 맞춰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누구나 괴로운 일은 있는 법, 한 가지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마!

그럴 땐 나처럼 툭툭 털면서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하략)


도연명도 똑같은 심정 아니었을까요? 도가 사상이라고 하니까 무지 거창한 걸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였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삶. 그러다가 보면, 또 괴롭고 아픈 순간들이 찾아오겠죠? 그러면 또 드라이브 한 방 때리고, 또 소리 한 방 질러주고, 또 음악에 맞춰 리듬에 맞춰 몸도 흔들어보고... 그리고 어떻게 하라구요?


한 가지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마! 그럴 땐 나처럼 툭툭 털면서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그런 의미에서 클론, <쿵따리 샤바라> 음악 한번 후련하게 때려보시겠습니다.


아이유 버전 <쿵따리 샤바라>를 들으시면 또 다른 도가의 싯단타 경지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얼른 클릭! ^^


아리사 작가님, 고전도 별로 어렵지 않으시죠? ^^

무연고 작가님, 이런 평범함도 맘에 드시나요? 맨날 늦어서 넘넘 죄송해요... ^^;;



#3-4. 임진자득의 삶 - 가고 멈춤


초목들은 즐겁구나 푸르름을 자랑하네, 시냇물은 흐르누나 졸졸졸 흘러가네.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목/흔흔/이향영, 천/견견/이시류.


찬미의 노래를 부르노라, 만물이 때를 얻었구나.

가슴으로 느껴보자, 우리네 삶의 ‘가고 멈춤’을!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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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목들은 즐겁구나 푸르름을 자랑하네, 시냇물은 흐르누나 졸졸졸 흘러가네. 

저는 이 구절을 대하면 이상하게도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 <환희의 송가>가 생각납니다. 작곡가 베토벤이나 평론가들이 뭐라고 말하든, 해석은 듣는 사람 맘 아니겠어요? 제 귀에는 환희에 대자연의 교향곡이 들립니다. 작가님들도 야외에 나가서 이런 장면을 목격하면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만 기다려보셔요. 산천초목과 흘러가는 시냇물이 즐거운 목소리로 함께 노래하는 이 멜로디가 정말로 들린다니깐요?


봄입니다. 아, 아직 좀 춥군요. ^^;; 아무튼 곧 봄입니다. 만물이 때를 얻습니다. 서구에서는 노스럽 프라이 Northrop Frye(1912~1991)가 신화비평론을 들고 나오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Four Archetype을 언급했습니다만, 사실 동아시아에서는 2천 년 전에 노자와 장자가 다 이야기했던 말이죠. 무엇을? 만물에는 모두 사시사철의 때가 있다고. 도가의 무위자연 사상, 어렵지 않죠? 도연명 덕분입니다.


그 기본 원리는 '행휴 行休'입니다. 대자연은 '가고 멈춥니다 行休'. 봄과 여름에는 가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멈춥니다. 저는 여기서 운을 맞추기 위해 '멈춘다'라고 번역했지만 원래는 '쉰다'는 뜻이죠. 영원히 멈추는 것이 아니라 쉬어가는 거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분인 만큼 그 원리를 깨닫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삶의 겨울'을 맞이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죽음'은 그러므로 단절이 아닙니다. '삶'의 또 다른 모습이죠. '삶'과 '죽음'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가다가 쉬어가는 것', 그렇게 인식합니다. 다음 해가 되면 다시 봄이 찾아오듯 '죽음'도 잠시 쉬어가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이야기.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니까, 우리도 때가 오면 쉬었다 가자는 뜻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아주아주 평범한 말이네요. <귀거래사>는 그 평범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4. 행휴行休, 쉬었다 가세


아서라!

이 우주에 우리네 육신을 맡겼단들 얼마나 오래 가리?

어찌하여 마음을 비우고 ‘가고 머무는(去留)’ 섭리를 따르지 않는가?


어찌 그리 바삐 바삐 무슨 일을 하려는가?

부귀영화는 나의 바람 아니로세, 신선세계도 기약할 바 못된다네.


청명한 날이면 홀로 산책을 나가 보세!

지팡이 세워두고 밭일을 하여보세!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심호흡을 하여보세!

맑은 냇가에서 시 한 수를 읊어보세!


잠시잠깐 대자연의 조화에 맡겼다가 돌아가니,

즐겁구나, 천명天命이여! 다시 또 무엇을 의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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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다 설명했죠? 여기서는 '행휴 行休'를 '거류 去留'라고 표현했군요. 같은 말입니다. '죽음'이란 만물이 그러하듯 때가 오면 쉬었다가 가는 시간. 그러니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시인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봄 여름 가을의 시간 안에서 '가는 일行, 去'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합니다. 어떻게? 거기, 중간에 쓰여 있네요.


산책을 나가자!

주어진 일을 하자! 그래야 먹고 살 게 아닌가!

심호흡, mindfulness, 청정 상태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명상하고 사색하자!

즐겁게 글을 쓰자!


아까 말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러다가 울적하면 어쩌라구요? 쿵따리 샤바라, 클론 버전이든 아이유 버전이든 골라잡아 즐기시면 됩니다. 거기에 브런치 열화당에서 오순도순 정다운 이야기 주고받으니, 여기가 곧 하늘나라 신선세계, 무릉도원에 유토피아 아니겠습니까!?(할렐루야, 아멘! ^^)




젊은 학생들의 경우, 무엇에 가장 집착하는지 아시나요? 성적... 그렇습니다. 근데 그건 지난번에 말했으니까 통과! 또 뭐가 있을까요? 돈... 물론 그렇죠. 근데 이건 아까 이야기했으니까 이것도 통과! 그럼 뭐가 남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 웬수 같은 사랑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 24시간 잠시도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며 사랑하게 해 달라. 집착하지 않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 사랑인가요? 하소연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그걸 불쌍한 소오생한테 따지면 어떡합니까요. 99번쯤 걷어 차이는 피눈물 나는 삶의 직접 체험을 겪어보던가, 아니면 뼈저린 공감 능력 발휘하여 작품 감상이라는 간접 체험으로 체득하시던가, 아무튼 스스로 깨쳐야 할 문제 아닐까요?


패티 페이지의 <The End of the World> 들으시면서, 집착의 행위와 최선의 노력... 그 경계는 어디인지,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다음 글의 주제는 <집착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Patti Page, <The End of the World>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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