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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r 30. 2024

19.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평범'의 진리를 헤아리며 (4)

※ 이 글은 '평범의 진리를 헤아리며' 쓰는 네 번째 글입니다. 지난 세 번의 글을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은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흐름이 무엇인지 알아보신 다음, 계속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6.  별유천지비인간, 무릉도원을 찾아서> '평범'의 진리를 헤아리며 (1)

<17. 울타리 아래 국화꽃 한 송이> '평범'의 진리를 헤아리며 (2)

<18. 삶의 가고 멈춤을 느껴보자> '평범'의 진리를 헤아리며 (3)



좌뇌에서 우뇌로



도가道家가 추구하는 정신은 한 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었습니다. 도가의 패러다임은 '대자연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었죠. 여기서 '대자연'은 특별한 대자연이 아니라 평범한 대자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위無爲는 바로 곧 평범平凡'인 것입니다. '평범'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 잠시 요점 정리를 해볼까요?


무위는 집착하지 않는 행위와 정신. 집착: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

무위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 행위. 내게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는 행위.

무위는 임진자득 任眞自得: 유토피아/무릉도원이란 내게 주어진 현실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움의 가치를 찾아나갈 때, 어느 순간 저절로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것.




남는 문제점: 경계선은 어디인가?

어디까지가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집착'인 것일까요?
그 경계선을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 경계선은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했던 '으뜸 가는 깨달음', 즉 '싯단타 siddhānta'의 경지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불교의 선종에서는 그런 경지는 논리적인 말로 설명이 안 된다고 했죠. 삶의 뼈저린 직접 체험 또는 '특별한 언어'인 '데샤나 deśanā', 즉 문학 작품의 감상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연고 작가님은 그 경계가 여전히 애매하다고 솔직히 고백하십니다.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 그런데, 그 범위가 늘 헷갈리고 인생에서 명확하지가 않죠." 그렇습니다.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마 다른 작가님들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닐까요? 인간의 내면세계란 원래 기계처럼 명쾌하게 나누고 자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저는 무연고 작가님에게 이렇게 댓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때 기도가 필요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서구식 기도 말구요, 동아시아적인 기도 말이죠. 마음을 청정 상태로 하면 스스로 그 경계를 느끼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게 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그 경계와 범위와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육/학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강점기 때에 들여온 '서양학'인 거 아시죠?


서양학은 이원론입니다. 처음부터 이 세상 모든 것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그어놓죠. 서양학의 일부인 인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학 공부처럼 개념 정의부터 먼저 내리고, 나머지는 그 틀에 끼워 맞추는 연역법의 공부 방식이자 감성적인 우뇌 활동을 억누르는 삭막한 교육 방법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예컨대 '사랑'이란 것이 개념을 정할 수 있는 걸까요? 경계선과 범위를 명쾌하게 그을 수 있는 것일까요?


서양학은 좌뇌 중심입니다. 문자 위주이론과 분석, 암기를 통한 지식 습득 교육을 위주로 합니다. 논리와 분석을 강요하는 고도의 이성 reason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좌뇌를 풀가동해야 하죠. 당연히 쉽게 피곤하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 인문학의 그런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는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브런치 작가님들처럼 독서와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극히 소수입니다.


이런 공부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과 괴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성적 잘 받아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한결같이 말하더군요. 선생님, 선생님 수업은 공부가 아니라 인생공부 같아요. 참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왜 공부와 인생공부가 달라야 하죠? 우리의 삶과 괴리된 그런 공부를 대체 무엇 때문에 해야 한단 말일까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전통 학문은 일원론입니다. 경계선을 명쾌하게 긋지 않습니다. 개념 정의도, 범위도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학文學'은 이론보다는 감상을 중시합니다. 그것도 문자보다는 소리 위주입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서당에서 훈장님이 몸을 흔들거리며 목청 높여 책을 읽으면 학생들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 읽는 식이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유레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일견 정말 비과학적이고 참 황당한 공부 방법 같습니다. 하지만 장점도 많습니다.


동아시아의 전통 문학은 우뇌 중심입니다. 보드라운 감성과 지혜, 그리고 실천을 중시합니다. 공자의 문학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보드랍고 따스한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이런 귀납법의 방식은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접하면 접할수록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서가 안정됩니다. 활발한 우뇌 활동을 통해 학습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 상태에서 조금씩 그 분야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논리와 분석의 힘은 그 결과물이 되어 저절로 따라온다는 이야기.


어떤 방법이 더 바람직할까요? 이제 좌뇌 중심의 패러다임은 많이 배우고 겪어보셨으니 잠시 우뇌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론에서 감상으로! 이런 방법으로!

이론에서 벗어나자.
경계선을 긋지 말자. 개념 정의도 범위도 정하려 하지 말자. 문자에서 벗어나자.

감상을 많이 하자. 특히 동아시아의 고전을 많이 감상해 보자.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소리 내어 감상하자. 수없이 낭송하며 작가의 정서를 공유해 보자.
조금씩 느낌과 깨달음이 생기면 내 삶에 적용해 보자.

 


귀양 나온 신선



오늘의 주제는 집착 없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감상할 대상은 너무나도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701~762)의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 몇 편을 감상하면서 무엇이 집착하지 않는 사랑인지 각자 많은 낭송을 통해 느끼고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감상을 도와드리고자 제가 나름대로의 느낌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설명을 드릴 텐데요, 제 말에도 너무 집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정답은 없는 것 아니겠어요? ^^




이태백을 모르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요?


이태백은 중국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최고봉으로 우뚝 솟은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입니다. 하지만 중국문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한국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전래 동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김부자, <달 타령>

어렸을 때부터 휘영청 밝은 달을 볼 때마다 공연히 월궁月宮의 선녀랑 옥토끼와 함께 그를 노래해 왔으니까요. 그가 누구인지 무엇하던 사람인지 굳이 알 필요도 없었죠. 달을 쳐다보면 그냥 습관적으로 그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혹시 브런치 작가님들처럼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성장한 분들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뇌리에 형성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중고등학교 시절 제가 이태백에 대해 느꼈던 막연한 이미지처럼.


일필휘지一筆揮之, 그의 붓이 종이에서 멋대로 춤을 추면 그게 바로 한 편의 시! 그 시가 탄생되는 순간 비바람이 몰아치고 귀신이 흐느낀다는 고금동서 최고의 천재 시인! 일년 삼백육십오일 언제나 달과 그림자를 친구 삼아 꽃밭 사이에서 통쾌하게 술을 즐기는 호주가豪酒家 이태백! 그러다가 술에 잔뜩 취하면 동쪽 시냇가 소나무 가지 위에 그 달을 잠시 걸어놓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하수의 장관을 지켜보는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이태백! 그리고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린 후 천지를 금침 삼아 큰 대大 자로 뻗어 눕는 광인狂人 이태백!


우리 뇌리에 그 모습이 선연히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 태자의 스승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이 그에게 '적선謫仙'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죠? '하늘나라에서 귀양 나온 신선'이라는 그 별명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본명은 이백. 태백太白은 그의 자字, 청련靑蓮은 그의 호號. 그는 벌써 출생부터 수수께끼 투성이입니다. 고향이 금릉金陵(오늘날의 남경南京)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사천 또는 서역西域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요. 대체로 조상이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 출신으로 죄를 짓고 서역으로 도망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일대를 전전하다가 그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백의 눈동자가 푸르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는 얼굴 생김새부터 중원의 중국인들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고 서역 문자를 줄줄 해독해 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혼혈이지는 않았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를 신선으로 추앙하는 고금의 숭배자들을 모독하는 것일까요?


아니, 확실한 고향과 출신 성분을 모른다는 사실은 오히려 오색구름 속에 파묻힌 선경仙境 같이 그의 이미지를 더욱 신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안휘성安徽省 당도當塗에서 병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고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을 더욱 믿고 싶어 합니다. 아무려나, 그는 귀양 나온 신선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오늘 제가 선정한 것은 우선 두 편입니다. 집착 없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느껴보기 위해 적합한 작품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고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더군요. 첫 번째는 <혼자 경정산에 앉아(獨坐敬亭山)>. 이백 답지 않게 조용히 관조觀照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하나하나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작가님이 시인 이백이 된 느낌으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 천, 히 낭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10번. 한자를 쓰면서 낭송하시면 가장 좋습니다.



경정산에 홀로 앉아


뭇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혼자서 한가히 거닌다.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싫증 내지 않으니,

오로지 경정산이 있을 뿐.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중조/고/비진, 고운/독/거한. 상간/양/불염, 지유/경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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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가요? 집착 없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 느껴지시나요? 네? 느껴지신다구요? 정말요? 에이, 농담이시겠죠? 정말이라면 소오생이 수십 년 동안 낭송하고 음미하며 생각하고 고민했던 지난 세월이 너무 덧없어지잖아요~ ^^;;


자, 이걸 그림이라고 생각해 보시죠. 화면 구도 속에 등장하는 존재는 아주 단순합니다.

새, 공간을 초월하여 하늘 높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 그 새가 날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구름,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한가로이 오가는 구름! 혼자 남은 구름은 외롭습니다.

산,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 자유를 누리는 그 새와 구름을 지켜보는 경정산!


그 경정산이 새와 구름과의 만남과 이별을 기뻐하고 슬퍼할까요? 천만에!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자연을 조용히 관조觀照하는 경정산이 소유의 집착에 사로잡힐 리가 없죠. 왜냐구요? 사라져 버린 새는 언젠가 다시 날아오게 마련이고, 흘러간 구름도 언젠가 다시 흘러오게 마련이니까요.


모든 집착은 결국 찰나의 시간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생명력의 사랑을 영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게 만드는 방법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순간의 집착을 버리고 관조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새와 구름은 언제나 산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유의 개념 따위가 필요하겠어요? 여기에 시인이 등장합니다.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싫증 내지 않으니”, 언제나 만인에게 흥겨움을 선사하는 이태백도 혼자서 지낼 때는 경정산을 마주 보며 대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있군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 대만 유학 당시의 제 생활지도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스물일곱 살. 선독생選讀生 자격으로 국립대만대학에서 정식 대학원생이 되기 위해 막 공부를 시작했었죠.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선독생 자격으로 수강했던 학점을 인정해 주고, 떨어지면 그냥 빠이빠이하는 제도였습니다.


저는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두환이 집권한 한국 사회의 그 숨 막힐 듯한 답답함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이 가장 컸죠.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가면서, 아 이제야 우물에서 벗어났구나. 여한이 없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는 감격에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정도니까요. 기회가 된다면 《붉은 별》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E. P. Snow; 1905~1972)처럼 중국의 오지를 다니며  《National Geography 같은 잡지에 기고하는 오지 여행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생각이 그러하니 남들처럼 진지하게 책상에서 공부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학부 2학년의 중국문학사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요, 선생님 말씀이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죠.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노트를 빌렸거든요? 아니 근데 한자를 개발새발(?) 날려썼는지라 알아볼 수가 없네요. 한 글자 한 글자 물어보다 보니 어느새 그 학생이 제 language teacher가 되었답니다.


그때부터 그 여학생은 제 기숙사에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거의 늘 제 자전거 뒤에 붙어 앉아서 캠퍼스를 싸다녔죠. 한국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늘 귀가 간지러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전 거리낄 게 하나도 없었답니다. 손 한 번도 안 잡아본 사이인 걸요.


방학에는 시골에 있는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는데요, 대륙의 하남성河南省 출신이신 부모님은 저를 너무나 잘 대해주셨죠.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 친구의 어여쁜 여동생은 옵빠 옵빠 울 언니 진짜 나뿐(!) 여자다? 애교 피면서 저를 졸졸 따라다녔구요. 지금 그 친구와의 스토리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풀어놓을 만한 이야깃거리도 전혀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덕분에 제 중국어 실력은 아주 유창해졌겠죠? 하지만 그건 대부분 습관이 되어 입에 붙은 말이었고, 정작 제 마음속에서 진짜로 하고픈 말은 제대로 표현을 못 하겠는 거예요. 결국 사소한(?) 일로 대판 다투고 저 혼자 학교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는데요, 개강을 하자 사과하고픈 마음에 그 친구의 숙소 앞에서 몇 번 기다렸답니다. 근데, 그 친구에게는 그게 그만 스토킹이 되어 버린 거죠. ㅠㅠ


느닷없이 숙소로 웬 군인이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그 친구 남친이라나요?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데, 으윽, 너무 열받잖아요. 아니, 누가 뭐래? 그냥 그러려니... 씁쓰레 한번 웃고 넘어갔으면 됐을 텐데, 젊은 치기에 더 화가 났답니다. 결국 그다음 날 다시 찾아갔는데, 당연히 못 만났겠죠? 만나봤자 사태만 더 악화시켰겠지만.  


며칠 후, 제 생활지도 교수님한테서 호출 명령을 받았습니다. 웬일이실까, 궁금한 마음으로 찾아갔더니, 세상에... 그 친구 이야기를 꺼내시는 거지 뭐예요. 저를 학과장님한테 신고했던 거죠. 이럴 수가! 창피한 마음보다 인간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두 마디 해주셨습니다.

(하나) 옥불탁, 불성기. 玉不琢, 不成器.
오생아, 옥구슬이라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단다.
내가 보기에 너는 옥구슬이야. 이제 그릇으로 만들어야지?

(둘) 새를 잡으려고 하지 마렴. 새가 날아와서 네 어깨, 네 손바닥에서 앉아 놀게 해 주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생님 말씀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만이 너무 싫어지고 더 이상 공부 같은 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입학시험을 보았죠. 다른 한국 학생들은 죽자 사자 밤잠도 안 자고 공부했는데, 저는 야릇한 감정에 휘말려 하나도 공부를 안 했으니 시험이야 보나 마나 뻔했지만 그래도 아니 볼 수는 없었죠.


그런데 시험문제가 이상하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 흔히 치르던 그런 지식과 정보 따위를 물어보는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글쓰기가 무려 40% 비중으로 출제되었지 뭐예요? 제목은 <나에게 대만이란>. 그동안 저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중국어로 글쓰기를 했더랬지요. 물론 language teacher였던 그 친구가 고쳐줬구요. 그중의 한 편을 휘리릭 갈겨쓰고 나왔는데, 세상에 제가 1등으로 합격해 버렸지 뭐예요.


합격하고 나니 선생님이 해주신 그 말씀이 비로소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새를 잡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 새가 날아와 놀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씀. 늘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가 이따금 꺼내어 음미해 보았지요. 평생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래, 새는 날아가면 다시 날아오고, 구름은 흘러가면 또 흘러오는 법. 문제는 나였구나. 나만 경정산이 되면 되는 거구나...


경정산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대자연입니다. 경정산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타인에게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담담하게 홀로 서서 타인의 쉼터가 되어줄 뿐이죠. 무더위 속의 싱그러운 나무 그늘. 아픔을 치유하는 싱그러운 에너지가 충만하게 모인 곳. 재잘재잘 아기 참새들이 모여 노는 곳, 더위에 지친 나그네들이 찾아와 고단한 영혼과 육체를 쉬게 하는 곳입니다. 그런 경정산이 되고 싶었습니다. (무연고 작가님, 재잘재잘 아기 참새... 여기 나왔죠? ^^)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속상할 때마다 하릴없이 다시 한번 경정산과 마주 앉아 봅니다.

  

뭇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혼자서 한가히 거닌다.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싫증 내지 않으니,

오로지 경정산이 있을 뿐.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중조/고/비진, 고운/독/거한. 상간/양/불염, 지유/경정산.


※ 후일담 : 유학생활 3년째. 강의실 강단에 올라가서 발표를 하고 있었습니다. 더운 나라인데 강의실에는 냉방 장치가 없는 지라, 커다란 창문은 늘 열려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주 쉽게 강의실 안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인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다가와서 빵끗 웃으며 말을 걸더군요. 이야, 너 이제 중국말 되게 잘하네. 멋있다, 얘. (중국말은 존대어가 따로 없답니다 ^^) 빙긋 웃고 아무 대답도 없이 돌아섰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참 한심하더군요. 그냥 다정하게 말을 받아줘도 되었을 것을. 저 참 형편없죠?

다람쥐가 내 손에 올라와 놀고 있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너 번 손 위에 올라와 놀더니 쪼르르~ 사라져 버렸다. 괜찮다. 다음에 또 놀러 올 거지? 2024. 3. 25. 설악산 토왕성폭포 전망대.



꽃밭 사이 한 병의 술


꽃밭 사이 한 병의 술, 친한 이 없어 홀로 마시는 술.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화간/일호주, 독작/무상친.


술잔 들어 달님을 초대하고, 그림자 마주 하니 셋이나 되었구나!    

아니, 저 달님은 술을 못 마신다구? 그림자는 어슬렁 나만 따라 다니누나.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 월기/불해음, 영도/수아신.


에라, 잠시 잠깐 데리고 놀지, 뭐. 즐거움은 때맞추어 즐겨야 하느니!   

내가 노래하면 달님도 어슬렁어슬렁.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덩달아 어지럽다.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

잠반/월장영, 행락/수급춘. 아가/월배회, 아무/영능란.


술 마시기 전부터 즐거움을 나눴으니, 술 취한 지금은 이제 그만 헤어지세.   

영원히 무정無情한 교유를 나누세나,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날 기약하세.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上期邈雲漢.

성시/동교환, 취후/각분산. 영결/무정유, 상기/막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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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홀로 술 마시며 月下獨酌>라는 연작시 4편 중의 제1편입니다. 이태백은 중국 시인 중에서 가장 낭만파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낭만浪漫이 대체 무엇일까요? 무엇이길래 이태백을 최고의 낭만파 시인으로 꼽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낭만'은 19세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서양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수입된 '로맨스 romance'란 단어의 음역이었습니다. '로만/로망 魯滿'이라고도 번역했지요. 낭만주의는 18세기 서구 문예사조 중의 하나였습니다. 인간의 개성과 감성을 존중하고,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낭만주의자는 꿈꾸는 비관주의자니,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로 취급받기도 했더군요. 그리고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대자연을 찬미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서구 낭만의 속성이었습니다.


중국에는 원래 '낭만'이란 단어조차 없었으니 이태백을 낭만파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하지만 많은 근현대 중국 문인들이 그를 낭만주의자로 규정하고 연구했으니 저도 할 수 없이 따를 수밖에요. 그런데 이태백의 낭만은 서구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의 모든 작품은 한결 같이 일정한 패턴을 보입니다.

(1) 언제나 존재의 비극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2) 슬픔 속에서도 즐거움과 흥겨움의 요인을 찾아낸다.
(3) 대자연에서 생명력을 얻어낸다.  
(4)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삶을 관조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태백 낭만의 첫 번째 요건은 지성知性입니다.


우리는 중고등학생들이 연애를 한답시고 길에서 손잡고 깝죽대면,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쯧쯧. 혀를 차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연애하는 모습을 보면, 히야~ 좋을 때다. 부러워합니다. 왜 반응에 차이가 있을까요? 대학생에게는 최소한의 지성이 있을 것으로 믿어주기 때문 아닐까요? 그러나 지성이란 단순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그 존재의 비극을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지성의 출발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한 곡조 듣고 넘어가 볼까요?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가사에 등장하는 이 정도 나이와 연륜은 있어야 낭만을 논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요? 대자연의 계절로 친다면 늦가을이나 초겨울 정도가 해당할 것 같습니다.




이태백은 <월하독작 1>에서 먼저 '인간 실존의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꺼내고 슬퍼합니다.


꽃밭 사이 한 병의 술, 친한 이 없어 홀로 마시는 술.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화간/일호주, 독작/무상친.


휘영청 달은 밝은데 활짝 핀 꽃밭을 찾아가 혼자서 술을 마시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이게 웬 청승이랍니까?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혼자면 혼자여서 외롭지만, 군중 속에 있을 때는 더 외롭고, 둘이 함께 있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황천길은 혼자서 떠나가는 것. 그 외로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갖춘 지성인 만이 낭만을 논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요?


젊은 친구들은 대부분 짧은 순간의 외로움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전화하여 확인합니다. 응, 자기야, 어디야? 뭐하고 있어? 상대방이 24시간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라고 강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방은 숨이 막힙니다.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나 자신의 짧은 순간의 외로움을 견디고, 상대방에게 여백의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재잘재잘 작은 참새들과 귀여운 다람쥐가 그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잖아요? 대자연은 언제나 저 혼자 존재하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게 대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사랑의 평범한 모습 아닐까요?




혼자 남은 이태백은 외로움 속에서 즐거움과 흥겨움을 찾아 나섭니다. 봄이 되면 만물이 때를 얻어 활기를 찾고 생명력을 자랑하듯, 설령 삶이 덧없는 것일지라도 기왕지사 초대받은 삶이니 그 속에서 최대한 즐거움의 공약수를 찾아 나섭니다. 어디에서 찾을까요?


술잔 들어 달님을 초대하고, 그림자 마주 하니 셋이나 되었구나!    

아니, 저 달님은 술을 못 마신다구? 그림자는 어슬렁 나만 따라 다니누나.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 월기/불해음, 영도/수아신.


에라, 잠시 잠깐 데리고 놀지, 뭐. 즐거움은 때맞추어 즐겨야 하느니!   

내가 노래하면 달님도 어슬렁어슬렁.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덩달아 어지럽다.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

잠반/월장영, 행락/수급춘. 아가/월배회, 아무/영능란.


어디서? 달. 달님이었군요. 너무나도 평범한 대자연이네요.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하늘의 달님과 지상의 그림자를 초대하여 술자리의 떠들썩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근데 애써 초대했더니, 아니 상대방 반응이 별로네요? 그 친구들 술을 못 마신다며 몸을 사립니다. 분위기 확 깨는군요. 이런 사람들 어디 가도 꼭 있죠? 그러나 시인은 실망하지 않고 유쾌하게 중얼거립니다.


괜찮아, 그럼 어때? 어차피 인생도 잠깐, 같이 노는 것도 잠깐. 즐기는 것도 때를 놓치면 말짱 꽝인 게야. 그니까 술을 못 마신다면 내가 노래를 부를 테니, 달님아 자네는 어슬렁 춤이라도 추어보시게. 어랍쇼? 우리가 춤을 추니까 그림자 이 녀석까지 덩달아 난리 부르스네? 하하하, 그것 참!


시인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나요? 인생의 쓴 맛을 알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유지하는 것. 순수란 그런 것 아닐까요? 이태백은 대자연에서 즐거움과 흥겨움의 요인을 찾아내고 대자연의 생명력으로 슬픔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삶을 관조합니다.


술 마시기 전부터 즐거움을 나눴으니, 술 취한 지금은 이제 그만 헤어지세.   

영원히 무정無情한 교유를 나누세나,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날 기약하세.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上期邈雲漢.

성시/동교환, 취후/각분산. 영결/무정유, 상기/막운한.


술 한 잔도 못 마시는 달님과 그림자를 데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시인은 이제 드디어 술이 취한 모양이네요. 그는 말합니다. 이제는 술이 취했으니 그만 헤어지자고.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정말로 헤어지고 싶은 걸까요? 이제 즐길 만큼 즐겼으니 아무 미련도 없다는 선언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시인도 헤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 같습니다.


술 취한 시인은 어떤 포즈로 머리 위 아득한 곳에 있는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문득 하늘 보고 드러누운 이태백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 있어 보이는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시인은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외로움마저 사랑하려 합니다.


시인은 영원히 무정한 교유를 나누자고 말하는군요.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날 기약을 하잡니다. 무슨 심정으로 한 말일까요? 무위無爲가 집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는 행동을 의미하듯이, 그리고 무심無心이 집착하는 마음 없이 최선을 다하는 행동을 의미하듯이, 무정無情은 집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이 슬프지만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하는 이유. 집착하는 사랑, 소유하는 사랑은 찰나의 사랑이기 때문 아닐까요? 대자연은 무정합니다. 집착하지 않고 소유하지도 않지만, 그 대신 영원히 사랑합니다. 시인도 대자연처럼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서 무정한 교유를 나누자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시인은 대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합니다. 아득한 은하수의 별이 되어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집착'은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죠. 내 뜻대로 그 누군가의 사랑을 얻으려는 것은 '집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마음대로 우주를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나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또 하나의 우주입니다. 그 우주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내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집착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수는 있지요. 그건 얼마든지 나의 의지로 실천 가능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목적이나 조건이나 요구도 없이,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진실하게 사랑을 베풀다 보면, 상대방의 사랑을 얻을 확률도 점점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밀려오면, 새들이 노래하고 별들이 반짝이며 우리를 사랑해 주면, 우리도 어느새 그 대자연과 사랑에 빠지게 마련이듯 말이죠.


그러나 설령 그러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겠어요? 나는 널 이만큼 좋아해 줬는데 너는 왜 나를 그만큼 좋아해 주지 않느냐고 따질 겁니까? 목에 칼이라도 들이대시려나요?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역효과가 나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무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불과했음을 증명하게 되는 거니까요.


문제는 뭐라구요? 어디까지가 '무정의 사랑'이고 어디서부터가 '집착의 행위'인지, 그 경계가 너무나 모호하다는 거죠. 그 대상이 이성異性이든 부모 자식 형제 간이든 누구든 간에, 한없이 사랑을 베풀다 보면 언제나 부딪치게 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집착하는 걸까, 사랑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무연고 작가님에게 이렇게 댓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때 기도가 필요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서구식 기도 말구요, 동아시아적인 기도 말이죠. 마음을 청정 상태로 하면 스스로 그 경계를 느끼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게 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이태백은 말합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생명력을 대자연에서 얻어오자구요. 그래서 도연명도 <귀거래사>에서 이야기했지요. 산책하라구요. 그리고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심호흡, mindfulness, 청정 상태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명상하고 사색하라고 합니다. 마무리는 어떻게? 즐겁게 글을 써라!


불교의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살려준 큰 지혜입니다.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우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아야 한다.

2. 세상살이에 곤란함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기 쉬우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야 함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3.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어야 한다.

4. 수행하는데 번뇌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번뇌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니, 모든 번뇌는 수행을 도와주는 벗으로 삼아야 한다.

5. 일을 성취하려고 할 때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니, 오랜 시간을 들여 일을 성취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6. 친구를 사귈 때 나만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니,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해야 한다.

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교만해지니,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곁에 두고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8. 공덕을 베풀되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니, 덕을 베푼 후에는 그것을 헌신처럼 버려야 한다.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니,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어야 한다.

10.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아야 한다.




패티 페이지의 <The End of the World> 들으면서, 집착의 행위와 최선의 노력... 그 경계는 어디인지,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Patti Page, <The End of the World> (1963)

태양은 왜 계속 빛날까요.

파도는 왜 계속 밀려올까요.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당신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새들은 왜 계속 노래할까요.

별들은 왜 하늘에서 반짝이는 걸까요.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당신의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은 이미 끝났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난 궁금해요.

모든 게 왜 예전과 똑같은지.

이해가 안 돼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삶이 계속 이어지는지.

심장이 왜 계속 뛰는 걸까요.

그리고 왜 눈물이 나는 걸까요.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당신이 헤어지자 했을 때 세상은 이미 끝났어요.


당신의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은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왜 여전히 해는 뜨고 여전히 파도는 밀려오고 여전히 새들은 노래하고 여전히 별들은 빛나는 걸까요?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시인의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패티 페이지의 슬픈 듯 차분하고 청아한 목소리도 그 사랑이 '집착'이 아닌 '사랑'이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다만 그 사랑은 인연이 아니었을 뿐.




◎ 대문 사진: 보노 작가님이 창공에 날아올라 촬영한 작품입니다. 사용을 허락해 주신 보노 작가님께 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작가님, 짱이예요. b.b.


 ◎ 3월 26일 중국 친구들과 설악산에 갔더니 눈이 오더군요. 형편없는 솜씨지만 눈구경 좀 하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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