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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Aug 22. 2024

24. 대자연을 초대하여 생명력을 얻어내라!

<제3부> 중국 음식과 인간관계 (8)

※ 이 글은 <23. 술, 술, 술! 낭만의 술을 마셔라>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려드리기 위해, 전편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올립니다. 



전편의 마지막 장면



낭송이 마지막으로 치달으니까, 아 글쎄, 십여 명이나 되는 그 중국 선생님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전부 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 함께 목청을 높여 마지막 부분을 함께 외치지 뭐겠니? 이렇게 말이지.


“위/얼 ()쌰오() (), (), ()!

“만고의 근심을 불살라 없애리라! (與爾同銷萬古愁!)”


우렁차게 합창(?)을 하고는 깐/베이를 외쳐대는데, 좌중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중국인 한국인, 선생 학생, 남녀노소 모두가 흉허물 없는 친구가 되어 하나로 어우러져 즐기는데, 이야~, 정말 대단했단다. 그 후 우리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 그럼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 낭만의 첫 번째 요건은 지성이다. 지성이란 단순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그 존재의 비극을 인식하는 것이 지성의 출발이다. 그러나 인간 실존이 제아무리 비극성을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초대받은 축복 아니겠니?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까? 덧없는 삶일지라도 기왕지사 주어진 여건이라면 그 속에서나마 최대한 즐거움의 공약수를 찾아내야 하겠지?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삶의 긍정적 요인을 찾아 나서는 것, 인생을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게 바로 낭만이다. 오케이? 공감이 되지?


자, 그렇다면 잔을 들어라!

흥겨움을 가득 담아 낭만의 두 번째 잔을 들어라!


정열을 위하여!

낭만을 위하여!

깐베이!



달님을 초대하여 생명력을 얻어내라!



근데요, 선생님. 그래도 잘 이해가 안 가요. 그래도 그렇지,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빌빌대더니 갑자기 워디서 그렇게 힘이 펄펄 났대요?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 대더니, 딱 그 짝이네요, 뭐. 


음,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이태백은 어디서 그 생명의 즐거움을 발견해 낸 걸까? 낭만주의자는 어떻게 그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얻어내는 걸까? 이번엔 그의 <봄날 밤의 연회(春夜宴桃李園序)>라는 작품을 읽어보자.



무릇 천지란 만물이 쉬어가는 객사客舍요, 

광음光陰은 영원한 나그네로세.

꿈처럼 덧없는 우리네 인생에 

즐거운 순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

옛사람들이 촛불을 밝혀놓고 

밤에 노닌 것도 참으로 다 까닭이 있었구나.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때는 양춘가절의 눈부시게 화사한 봄날 밤, 이태백은 여러 시인 묵객들과 함께 복숭아꽃 오얏 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화원에서 파티를 열었대. 가든파티! 햐, 좋겠다. 그런데 낭만은 어떤 거라고? 먼저 우리네 삶이 얼마나 덧없는가, 그걸 강조해 준다고 그랬지? 그래야만 신나게 놀자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아니겠어? 


그런데 슬픈 사람은 놀 힘이 없잖아. 어디선가 힘을 빌려와야 놀 수 있을 것 아니겠니? 자, 이태백이 어디서 그 생명력을 가져오는지 계속 그 뒤를 읽어보자꾸나.



하지만 이 따스한 봄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풍경이 우리를 부르고 있지 않소이까!

게다가 이 대자연은 우리에게 문장력을 빌려주지 않았소이까!

況陽春召我以烟景, 大塊假我以文章 


복숭아꽃 오얏 꽃 만발한 화원에 이렇게 모였으니, 

천륜의 즐거움을 펼쳐보십시다 그려!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


여기 계신 아우님들,  모두 다 그 옛날 사혜련처럼 빼어난 재주를 지녔거늘,

오로지 내 노래만 보잘것없을 터라, 그 옛날 사령운처럼 부끄럽기 짝이 없소.

群季俊秀, 皆爲惠連 吾人詠歌, 獨慚康樂 



어디서 그 생명의 즐거움을 발견해 낸 것이라고? 대자연! 대자연이란다. 낭만주의자는 대자연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빌려와 우리의 슬픔을 치유해 준단다. ‘자연’은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신념이지. 낭만주의자 이백은 그리하여 소리 높여 흥겹게 노래한다. 자연을 초대하라! 달님을 초대하라! 

<봄날 밤의 연회(春夜宴桃李園序)>에 대한 자세한 해설 및 감상과 낭송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20. 비극 역시 초대받은 축복이라> ☜ 클릭


이번에는 그 유명한 <달빛 아래 홀로 술 마시며 月下獨酌1>를 같이 한번 읽어볼까? 



꽃밭 사이 한 병의 술,    

친한 이 없어 홀로 마시는 술.   

술잔 들어 달님을 초대하고,   

그림자 마주 하니 셋이나 되었구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아니, 저 달님은 술을 못 마신다고?  

그림자는 어슬렁 나만 따라 다니누나.  

에라, 잠시 잠깐 데리고 놀지, 뭐.   

즐거움은 때 맞추어 즐겨야 하느니!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내가 노래하면 달님도 어슬렁어슬렁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덩달아 어지럽다.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



휘영청 달은 밝은데 활짝 핀 꽃밭을 찾아가 혼자서 술을 마시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렴. 이게 웬 청승? 그러나 이태백은 천연덕스럽게 하늘의 달님과 지상의 그림자를 초대하여 술자리의 떠들썩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게 낭만이다. 


근데 애써 초대했더니, 아니 이 친구들 보게? 술을 못 마신다네? 그러나 낭만은 실망하지 않는다. 여기 이 시인처럼 유쾌하게 중얼거린다. 


괜찮아, 그럼 어때? 어차피 인생도 잠깐, 같이 노는 것도 잠깐. 즐기는 것도 때를 놓치면 말짱 꽝인 게야. 그니까 술을 못 마신다면 내가 노래를 부를 테니, 달님아 자네는 어슬렁 춤이라도 추어보시게. 어랍쇼? 우리가 춤을 추니까 그림자 이 녀석까지 덩달아 난리 부르스네? 하하하, 그것 참! 


천진스러운 이태백의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니? 인생의 슬픔을 알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유지하는 것, 그게 순수란다. 달님과 대자연의 생명력으로 슬픔을 치유한 순수의 마음, 그게 낭만이란다. 지성과 감성, 그리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갖춘 순수한 낭만주의자만이 우주와 자연에 내재된 ‘진리(眞)’와 ‘선함(善)’과 ‘아름다움(美)’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는 거란다. 


자, 그럼 이제 달빛 아래 활짝 핀 꽃밭을 찾아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흥겹게 술 마시는 저 이태백의 심정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겠지? 그렇다면 한 잔 또 안 할 수 없지. 낭만의 세 번째 잔, 달님을 초대하고 자연을 초대하여 마시는 이 술잔은, 무엇을 위하여? 순수를 위하여! 생명력을 위하여! 낭만을 위하여! 깐베이!     




외로움을 사랑하라조용히 관조하라     


그러나 낭만의 술은 필경은 혼자서 마시는 술, 외로움을 사랑하는 술이다. 그걸 모르면 안 된다. 아니, 왜요? 슬픔은 첫 잔으로 충분하다면서요? 낭만의 술은 대자연의 생명력을 얻어와 흥겹게 마시는 술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론이다. 하지만 언제나 타인과 함께 잔치만 벌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인생은 혼자서 외롭게 지낼 때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떠날 때는 말없이, 저승길은 혼자서 외롭게 떠나가는 길 아니던가! 그러므로 타인과 함께 있을 때만 낭만이라면 낭만이 아니다. 혼자서 지낼 때도 그 외로움까지 사랑하며 멋있게 지내야 진정한 낭만이다.


아하, 그게 정말 그렇겠군요. 그런데 외로움을 어떻게 사랑해야 멋있는 거죠? 하하, 글쎄? 그런 건 오히려 말로 표현하는 그 순간, 멋이 사라져 버릴 것 같지 않니? 그런 건 그냥 느끼는 거 아닐까? 아까 읽던 시의 뒷부분, <달빛 아래 홀로 술 마시며 月下獨酌1>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껴보자.



술 마시기 전부터 즐거움을 나눴으니,   

술 취한 지금은 이제 그만 헤어지세.   

영원히 무정無情한 교유交遊를 나누세나,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날 기약하세…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永結無情遊, 上期邈雲漢 



술 한 잔도 못 마시는 달님과 그림자를 데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이태백은 이제 드디어 술이 취한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이제는 술이 취했으니 그만 헤어지자고. 헤어져서 영원히 무정한 교유를 나누자고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정말로 헤어지고 싶은 걸까? 무슨 심정으로 한 말일까? 이제 즐길 만큼 즐겼으니 아무 미련도 없다는 선언일까? 


아득한 은하수에서나 다시 만날 기약을 하잔다. 술 취한 그가 어떤 포즈로 머리 위에 있는 아득한 은하수를 바라보는 걸까? 문득 하늘 보고 드러누운 이태백의 모습이 보인다. 그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있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시인은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외로움마저 사랑하려 한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정한 교유를 나누자고 애써 담담하게 말한다. 


낭만주의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들이다. 낭만은 그러므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홀로 서서 타인의 쉼터가 되어 준다. 무더위 속의 싱그러운 나무 그늘, 더위에 지친 나그네의 영혼과 육체가 쉬어 가는 곳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싱그러운 에너지가 충만하게 모인 곳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시간과 공간의 주관적 상황을 초월하여 객관적 시각에서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관조觀照의 지혜를 배운다. 


그런 게 홀로 지내는 낭만의 멋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태백의 <혼자 경정산에 앉아 獨坐敬亭山>를 읽으며 확인해 보자.     



뭇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혼자서 한가히 거닌다.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싫증 내지 않으니,

오로지 경정산이 있을 뿐.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자, 이걸 그림이라고 생각해 보자. 화면 구도 속에 등장하는 존재는 너무도 단순하다. 새, 공간을 초월하여 하늘 높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 구름,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한가로이 오가는 구름! 산,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 자유를 누리는 그 새와 구름을 지켜보는 경정산! 그 경정산이 새와 구름과의 만남과 이별을 기뻐하고 슬퍼할까? 


천만에! 그럴 리가 없다. 대자연을 조용히 관조하는 경정산이 소유의 집착에 사로잡힐 리가 없다. 사라져 버린 새는 언젠가 다시 날아오게 마련이고, 흘러간 구름도 언젠가 다시 흘러오게 마련. 관조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언제나 함께 있는데 소유의 개념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여기에 시인이 등장한다.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싫증 내지 않으니”, 언제나 만인에게 흥겨움을 선사하는 이 태백도 혼자서 지낼 때는 경정산을 마주 보며 관조의 지혜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달빛 아래 홀로 술 마시며 月下獨酌1>와 <혼자 경정산에 앉아 獨坐敬亭山>는
다음 글에 자세한 해설과 감상,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꼭 이 글과 같이 읽어보셔요? ^^*
 
<19.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관조의 지혜는 혼자 마시는 술에서 배운다. 대자연의 메시지를 포착하고 그 속에서 생명력을 얻어내려면 술을 마셔도 이렇게 혼자서 마셔야 한다. 왜요? 왜 꼭 혼자 마셔야 하는 건데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관조의 지혜를 배우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거야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관조를 하려면 시간과 공간마저 버려야 하거늘! 고요히 정신을 집중하여 대자연과 주파수를 함께 해야 하거늘! 누군가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분산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그 님이 옆에 있다? 어여쁜 아가씨는 푸른 풀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꽃뱀! 가슴 두근거리는 그 이성異性과 함께 대자연에 깊이 숨은 그 심오한 메시지를 포착한다는 건 인간으로선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인간은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가게 마련인 법 아닐까? 




혼자서 술잔을 조용히 채워보자. 

홀로 지내는 이 시간의 외로움을 사랑하자. 

이 뼈저린 외로움을 삶의 내공內功을 수련하는 여유의 시간으로 만들자. 


눈을 들어 다시 한번 대자연을 바라보자. 

소유의 집착을 버리고 우리의 내면에 싱그러운 에너지를 채워보자. 


술은 언제나 감성으로만 마시는 게 아니다. 

때로는 관조의 차분한 이성으로 조용히 마시기도 하는 법. 


낭만의 술은 혼자서 마시는 술, 외로움마저 사랑하는 술이다. 

혼자서 건배하는 이 술은 느릿느릿, 모든 것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술이다. 


나는 조용히 나에게 속삭인다. 

깐/베이! 


멋진, 

외로움을, 

위하여….






다음 글은 이 매거진의 마지막 부분, 차茶 문화 이야기입니다. 




[ 대문 사진 ]

소매물도. 


여기 올린 사진은 모두 이중도 시인이 찍어서 보내주신 거다. 시인은 1993년 《시와시학》신인상으로 등단했는데, 특이하게도 서울대 법대를 나왔단다. (요새 무척 쪽 팔리실 듯.^^) 어느 날 문득 모든 일을 접고 귀향하였단다. 고향의 민초들과 고향의 앞바다 무인도에 신화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작품집에《통영》《새벽 시장》《당신을 통째로 삼킬 것입니다》《섬사람》《사라졌던 길들이 붕장어 떼 되어 몰려온다》《고래 서방》등이 있다. 


윤이상 기념관 관장이기도 하다. 관장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직원이 한 명이니까 관장 맞다. 20세기 전 세계 최고의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님의 제자리를 찾아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 통영 예술의 숨은 에피소드를 아주 많이 알고 있다. 박경리 선생님, 전혁림 화가 이야기가 특히 재밌다. 언제 한번 글로 쓰겠다. 술고래여서 딸피는 만나기가 무섭다. 안녕하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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