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춘추필법春秋筆法 정신 중의 하나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당시에 일본이 서양의 근대 문물을 들여오며 번역 소개한 용어에는 이런 일상생활 용어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상당히 많은 단어들이 당시 일본이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옛날에는 우리가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해주었다고 배웠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게 더 많잖아? 이 정도면 일본 덕분에 우리가 근대화되고 잘 살게 된 게 사실 아니냐. 그런데 왜 우리 좌파는 그런 사실을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전 세계에서 일본의 힘을 무시하는 건 한국 사람뿐이라더라. 아니, 그렇게 무시하면서 일본을 무서워하고 경계하는 이유는 또 뭔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근대'라는 '이름'에 숨어있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포폄!
차제에 몇 가지 측면에서 '근대화'의 잘잘못을 생각해 보자.
첫째, 정확하게 말하자. 19세기 이후에 우리나라가 영향을 받은 실체는 일본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 문물이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은 번역 용어다.그 덕분에 우리가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서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요 언어도단이다.
둘째, 세상만사에는 반드시 득과 실이 함께 존재한다. 당시 서구 물질문명에는 근대화라는 긍정적 요소와 함께, 제국주의의 '침략'과 '탐욕'과 '야만'이라는 부정적 요소가 공존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던 제국주의자들을 '선진 문명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타당한지 잘 생각해 보시라. 21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물질문명의 폐해가 인류의 지속 가능성 위기를 불러온 작금의 상황도 곰곰 생각해 보시라. 무엇이 득이고 실인지는 보다 거시적으로 인류문화사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인류사적인 시대의 흐름이 근현대에 접어들었으므로 근대 문물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동아시아 최초로 전기를 들여와 사용한 나라는 우리나라다. 1887년 고종은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 회사와 직접 계약하여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에서 사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전기 문화를 주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데 약간의 도입 시점의 선후를 가지고 우열을 논한다는 것은 어린아이 논리다. 친일 매국노 청산에 성공한 중국에서는 일본 덕택에 근대 문물이 들어왔다는 논리 따위는 씨도 안 먹힌다.
동아시아의 전기 발상지. 1887년 3월 6일, 이곳에 설치한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로 경복궁에 750개의 전등을 밝혔다.
넷째,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물론 당연히 절대로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역량을 무시하면 더욱 안된다. "조선인은 싸구려 '엽전', 당파 싸움 하느라 국력을 몽땅 말아먹었어. 고종과 같은 무능한 임금 때문에 나라를 운영할 힘을 상실했지. 그래서 일본이 대신 근대화를 시켜준 거야..." 그런 식민 사관에 빠져서 우리 스스로를 무시하고 자기 비하를 해서는 안된다.
조선은 당파 싸움에 날을 새운 게 아니라 정당 정치를 시행한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간신과 매국노가 나라를 멸망시킨 일은 동서고금에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500년 동안이나 이어진 국가는 세계사에 드물다. 조선이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균형 있는 정당 정치와 같은 정교한 국가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종도 결코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다. 그는 덕수궁에 석조전을 만드는 등 강력한 의지로 나라의 근대화를 실천했다. 어떤 면에서는 심지어 세종대왕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 조선은 낙도落島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 이른바 '쇄환刷還 정책'을 450년 간이나 시행했다. 세종대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마도를 정벌하고도 방치하여 오늘날 일본 땅이 되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종은 쇄환 정책을 폐지하고 울릉도와 독도에 민간인을 이주시켜 영토를 지켜냈다. 그가 아니었으면 독도는커녕 울릉도마저 일본의 손에 넘어갈 뻔했으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탁월한 식견과 실천력을 짐작할 수 있다.
울릉도 태하에 있는 벽화. 고종의 치적을 기념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일제의 교묘한 식민사관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에 빠지는 일은 절대 금물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을 막론하고, 그 역사와 문화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다.
다섯째, 일본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팩트 체크를 하자는 말이다. 우리나라 학계에는 동아시아 고전에 대한 일본 학계의 방대한 번역 성과에 대해 감탄하는 흐름이 있다. 그 업적을 무시하거나 폄훼해서는 안된다. 이른바 일본인 특유의 장인 丈人 정신이라고나 할까, 번역 작업에 투자한 그 노력과 정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접해 본 개인적 경험으로 판단해 볼 때, 그 내용의 깊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우선 그들이 번역한 용어들 중에는 오류 또는 편견이 상당히 많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고뇌가 따르는 작업이다. 우리는 흔히 A언어와 B언어가 서로 대등한 개념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가촉명사 可觸名詞'인 경우에는 대등한 단어를 찾아 비교적 쉽게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불가촉명사 不可觸名詞'인 경우에는 까다로워진다.
추상명사일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 A언어와 B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아시아와 서구인들의 생각 패러다임은 거의 상반된다. 위에서 사례로 언급한 일반 생활 용어 따위야 무슨 큰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문학 분야의 용어는 결정적으로 인간의 생각의 틀을 크게 좌우한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심각한 갈등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공자의 춘추필법 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어휘의 정확한 뜻과 이름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정명의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대한민국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역사적 사건의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포폄의 가치 판단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정명과 포폄의 양자兩者는 둘인 듯 하나다. 이제 그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일제가 붙여놓은 '그 이름들' 뒤에 숨어있는 함정의 실체를 추적해보려 한다. 강호 제현의 질정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