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 넘은 짓거리를 벌여서 작가님들께 도움을 드리기는커녕 혹시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지는 않을지,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점점 고질적인 직업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 일을 벌리고 나니 두려워집니다.
기탄없는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김대술 신부님의 시집 세 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바다의 푸른 눈동자》(2013),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2018), 《수원방랑》(2021).
성공회 사제이신 김대술 신부님은 20여년 동안 나환우, 나눔의 집,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빈민 사목을 하셨습니다. 특히 2019년 초까지는 수원 다시서기지원센터의 장長으로 근무하셨는데요, 이때 노숙인과 함께 뒹군 거리의 이야기들을 두 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던 사제 시인이십니다.
제가 예전에 근무했던 학교는 2016년부터 경기도와 수원시의 위탁을 받아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시작할 그 무렵, 하필이면 제가 보직을 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되는 바람에, 신부님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2020년에 신부님이 강화도로 근무처를 옮기셨을 때였습니다. 수원 시절의 남은 글을 모아 《수원 방랑》이라는 이름으로 세 번째 시집을 내신다며 제게 '독후감(해설?)'을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문학평론가도 아니고 시를 전공한 사람도 아닌지라 완곡히 사양했습니다만, 결국 신부님을 응원하는 마음 하나로 감히 소개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중 두번 째 시집인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독후감입니다.
강경 작가님의 <죄짓는 마음> & <집 짓는 마음>과 연계하여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전쟁은 지금 우리 주변의 삶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요...
벗님이 그리운 순례자의 생명 교향곡 3부작 (2)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는 신부님이 노숙인과 함께 뒹군 거리의 이야기 제2탄이다.
제2탄은 제1탄보다 낭송하기가 좀 더 버겁다.
인간의 청각활동에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데시벨 영역이 있다.
시詩 낭송도 마찬가지다. 소리의 장단長短과 고저강약에 모두 적정 영역이 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낭송이 포용하는 데시벨 영역의 경계를 극에서 극으로 넘나든다.
낭송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만큼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명상하고 행동하는 순례자의 노래,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
이 시집의 감상 키워드는 기도와 명상, 울분과 절규다.
기도와 명상은 소리가 없다. 지하의 동굴에 고인 호수처럼 정적에 휩싸여있다. 이따금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있지만 섬세한 안테나를 발동하지 않으면 포착하기 어렵다. 울분과 절규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무섭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다. 강렬한 고음에 금방 귀가 먹먹해지고 청각이 마비되어 버린다.
소리가 그렇다는 것은 정서도 그러하다는 뜻. 명상에 잠겨 조용히 반짝이던 지성의 모습이 울분의 화산이 터지듯 이글거린다. 정서의 기복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화하면 독자는 작가의 정서를 쫓아가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시인은 왜 이렇게 극단을 달리는 걸까? 그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분노하고 절규하는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일까?
할머니 죄를 고백하세요…….
뭔 죄가 있을랍디요 사는 게 죄지.
-〈고해성사〉 전문
내키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거룩한 땅은 어느 곳에도 없고, 당신이 서 있는 곳인지 모를 일입니다. … 중략 … 통곡해야 할 벽에 눈물은 없고, 전차 경기하던 밤의 향락, 로마군단을 위한 바닷가의 목욕탕 별것도 아닙니다. 지중해 넘실대는 물결은 오줌 한 번 갈기면 발목 잠기는, 내 고향 추자도 후포와 똑같았습니다. … 중략 … 순례의 길은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왜 이다지도 슬퍼하는 것인지, 모두 아파서 중병에 걸렸는데 도무지 약도 의사도 무서워 덮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에게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길이 없다는 아우성이 하늘을 울립니다. 이 땅의 슬픔을 발견해내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굳은 실천적인 사유가 있는 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 <이스라엘 순례를 마치고>에서
사제 시인이 기도하고 명상하는 이유, 신神이 아니라 인간 때문이었다. 형이상학의 거룩한 명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의 삶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순례’란 신의 땅을 찾아가서 성령의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슬픔을 발견해내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적인 사유’다.
그리하여 시인은 기도하고 명상한다. 이 땅의 산과 바다에서[ 주 1 ], 항구의 저자 거리와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 선술집에서[ 주 2 ], 음악과 미술과 공예품 속에서[ 주 3 ], 역사적 인물과 사건 속에서[ 주 4 ], 이 땅의 모든 것을 순례하는 길 위에서 늘 슬픔을 발견해내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적 사유에 잠긴다.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의 절반은 순례자의 명상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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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 ] 〈반야봉 새벽 운무〉·〈덕유산에서〉·〈비양도〉·〈남도여행〉·〈돗돔〉·〈홍어 애〉·〈다금바리〉 등 참조.
[ 주 2 ] 〈목포의 눈물〉·〈유달산 달동네〉·〈돌아와요 부산항에〉·〈수원역 일미집〉 등 참조.
[ 주 3 ] 〈겨울나라 뜨거운 노래〉·〈김홍도 씨름도〉·〈최순우 조선백자 달항아리〉·〈고려청자〉 참조.
[ 주 4 ]〈전봉준〉, 〈장준하 선생님〉, 〈어제와 내일의 세월호〉 등 참조.
모든 시인은 순례자이다. 그러나 신부님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 대부분의 시인이 마음속 순례에 머무는데 반해, 신부님의 순례 길은 심로역정心路歷程에서 그치지 않고 실상實相의 세계로 이어진다. 모진 추위에 쓰러진 소외받은 자들의 대부가 되어, 함께 뒹굴며 슬퍼하고 통곡하는 거리의 삶을 산다.
삼보일배 오체투지五體投地보다 더욱 실천적인 이 순례의 길을 통해 시인은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 땅의 “문명은 야만과 증오가 흘린 피의 강”이라는 사실을. 이 땅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희망은 지구에서 4000광년이나 떨어진 미리내의 별 NGC 2440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 주 5 ] 늘 개돼지처럼 살며 죽음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다가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는 수많은 슬픔을 끊임없이 목도하면서, 시인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진다.
고등동 뒷골목
서울 가는 길 막혔지만
짙은 안개 포근한 이불처럼
단칸방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한 치 앞 보이지 않던
드러난 살갗 잊을 수 없도록
숨을 거둔 털보 새벽이 덮어준다
피 토하다 이제야 쉬는 노숙인
- <털보>에서
술 먹다 말고 올렸는지
오십구 년 돼지띠 음력 칠 월생
호적에는 오십팔 년 개띠로 적어
두 인생 버거워 취한 개돼지가 되어
올 더위 못 넘길 줄 알았는데 용하다
빌어먹는다고 고생했던
폐에 물 차 먼저 간 박씨
술병으로 집중치료실에서 죽은 털보
노숙 판 여인 만나 새끼 둔 김씨
통닭 사러 가다 차에 치인 막내
같은 처지 요양병원 외로운 이씨
수급비 삼십팔만 원으로 버티다가 응급실 간 최씨
모두가 개돼지로 불리며 잘들 살았다 … 중략 …
다음에는 돼지로 진흙탕 뒹굴다가
목에 칼이 콱 들어오는 축제 벌여
크게 하늘 보고 웃어야겠다.
- <웃다 간다>에서
노숙자 박씨, 털보, 김씨, 막내, 이씨, 최씨…, 모두가 개돼지로 취급받으며 죽지 못해 살고 살지 못해 죽어간다. ‘개돼지’는 시니컬한 자조自嘲의 넋두리가 아니다. ‘가진 자’들이 ‘못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인식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팩트fact다. 그러고 보니 59년생 돼지띠인 우리의 사제 신부님도 호적에 58년 개띠로 잘못 올라 그들과 함께 개돼지가 되었단다. 쓴웃음도 잠시, 운명적으로 개돼지가 된 시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된다.
가난한 백성 돌보던 선비정신 마치고 삼대 지나 노숙인이 되고 보니 갑오 을미 지나 그렇지 않아도 병신년인데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백성이 하늘이라 피 흘려 외치는 우금치 … 중략 … 닥치고 이거나 먹어라. … 중략 … 최저임금 올리고 고임금 내리거나 동결하면 될 것을 낙수효과 웃기지 마라 재벌 배때지 나온 이유를 정녕 모르느냐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무섭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속아 넘어가지 마라 아픈 세상을 바꿔야지 너만 성찰하고 동사무소에서 인문학 하냐 … 중략 … 닥치고 이거나 먹어라. 3D 업종 안 간다고 웃기지 마라. 1년 하고 모가지 날아가고 임금 적어 새끼들 가르치지도 못하고 그것 벌어 결혼도 못하고 고물가에 어떻게 살아가냐 그러니 노숙하지 … 중략 … 이 썩을 놈들아 당장 닥쳐라 … 중략 … 공부하는 학자들 연구 못하면 노가다 돈이나 벌어라 공부해서 네가 가지려고 하지 말고 제발 우리가 남이냐 … 중략 … 할 것 못하면 닥치고 이거나 먹어라 … 중략 … 이 썩을 놈들아 당장 닥치고 이거나 먹어라.
-〈닥치고 이거나 먹어라〉에서
그 절망의 현실에 부르르 몸을 떨며 시인은 주먹질을 하면서 욕을 퍼붓는다. 그에게 들려오는 세상의 모든 소리는 외친다. 저항하라고! 광화문 광장 촛불을 든 민초들의 함성, 우금치 벌판 동학혁명 민초들의 고함소리, 전인권의 뜨거운 노래가 절규한다. 취하지 못한 운명에 저항하라고. 독이 뚝뚝 떨어지는 열망을 회복하라고! [ 주 6 ] 끊임없이 나타나는 거대한 비극에 질식하여 쓰러졌던 사제 시인도 일어나서 소리 높여 절규한다.
모든 주어진 신을 저항하라
신을 믿는다는 너의 폭력을 저주한다. … 중략 …
네가 믿는다는 비겁한 신에게 반항한다. … 중략 …
세계의 거짓된 모든 신에게 저항할 것이다. … 중략 …
왜냐고 질문한다면
비극이 반복되어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
끊임없이 나타나는 거대한 슬픔에 질식한다는 것
나의 부끄러움에 저항하고 행동할 것이다.
- <저항하라>에서
신에게 저항하라!
시인은 신을 믿는다는 자들의 폭력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땅의 비극을 방관하기만 하는
그런 비겁한 신, 거짓된 신과 맞서 싸우겠노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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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5 ] 〈세상의 모든 93.1Mhz〉·〈NGC 2440〉참조.
[ 주 6 ] 〈전봉준〉·〈겨울나라 뜨거운 노래 – 전인권 콘서트에 부쳐〉 참조.
여기서 혹자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아니, 신부님이라는 양반이 하나님한테 저항하라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도 일으키자는 말이요? 사제 시인이 아니라 좌파 혁명가 아뇨? 그리고 대충 살펴보니까 운문인지 산문인지 기록문인지 정체불명의 글들이 많던데, 이거 순 엉터리 아냐?
필자가 대신 답변해드린다. 당신의 그 하나님은 거짓 하나님이라고. 참된 휴머니즘을 혁명가라는 이름으로 빨갱이 취급하지 마시라고. 당신은 그저 모순의 현실에 눈을 감고 싶을 뿐이라고.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루쉰魯迅의 청년 시절 꿈은 의사였다. 그러나 중국 민중이 영혼마저 마비되어가는 현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아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의사를 포기하고 문학을 도구로 먼저 영혼의 병을 고쳐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루쉰은 점차 문인이라기보다는 혁명가에 가까운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의술은 우리 삶의 목적지가 될 수 없다. 문학도, 사제 시인도,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 구원’ 그 자체 아니겠는가. 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괴리된 학문은 결단코 학문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 학문의 전통 정신이다.
시인이 목도한 현실은 너무도 절박하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 무한 반복되고 있는 이 땅에서, 민초들은 오늘도 죽음의 언저리에 서서 개돼지처럼 살다가 개돼지처럼 죽어가고 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죽어간다면? 누구라도 너무나 다급해질 것이다. 그 절박한 순간에 신부인지 시인인지 혁명가인지, 운문인지 산문인지 기록문인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그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게 장땡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