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 넘은 짓거리를 벌여서 작가님들께 도움을 드리기는커녕 혹시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지는 않을지,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점점 고질적인 직업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 일을 벌이고 나니 두려워집니다.
기탄없는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김대술 신부님의 시집 세 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바다의 푸른 눈동자》(2013),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2018), 《수원방랑》(2021).
성공회 사제이신 김대술 신부님은 20여 년 동안 나환우, 나눔의 집,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빈민 사목을 하셨습니다. 특히 2019년 초까지는 수원 다시서기지원센터의 장長으로 근무하셨는데요, 이때 노숙인과 함께 뒹군 거리의 이야기들을 두 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던 사제 시인이십니다.
제가 예전에 근무했던 학교는 2016년부터 경기도와 수원시의 위탁을 받아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시작할 그 무렵, 하필이면 제가 보직을 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되는 바람에, 신부님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2020년에 신부님이 강화도로 근무처를 옮기셨을 때였습니다. 수원 시절의 남은 글을 모아 《수원 방랑》이라는 이름으로 세 번째 시집을 내신다며 제게 '독후감(해설?)'을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문학평론가도 아니고 시를 전공한 사람도 아닌지라 완곡히 사양했습니다만, 결국 신부님을 응원하는 마음 하나로 감히 소개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첫째, 시인의 노숙인 시리즈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현대한국사회의 자본주의가 저질러놓은 어둡고 슬프고 더러운 장면들이 옛날 신문의 흑백 보도사진처럼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별로 듣고 싶지 않아 한다. 게다가 책을 펼치면 노숙인의 퀴퀴한 냄새가 천지를 진동한다. 그 냄새를 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기억의 뇌세포에 저장된 그 썩은 내가 그대로 재현되어 풀풀 풍겨오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 구원’이고 ‘휴머니즘’이고 뭐고 간에 우선 당장은 그 악취에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둘째, 시 감상에는 낭송이 최고인데, 이 시집은 낭송이 잘 안 된다. 시집이라면서 운문체가 아니라 대부분 만연체의 장문長文으로 쓰여 있다. 더구나 그 긴 문장에 이따금 마침표만 찍혀 있을 뿐, 놀랍게도 쉼표가 하나도 없다. 어디서 쉬어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낭송을 하면 소리가 엿가락처럼 늘어지다가 호흡이 가빠져서 급기야 아무 데서나 쉬게 된다. 눈으로 훑어보면 내용은 대충 알 것 같은데, 소리로는 잘 읽히지 않으니 좀처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독자와 작가의 공감대 형성이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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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필자가 해설 글을 보내드린 이후로 또다시 내용을 대폭 수정하신 부분이 많았다. 편제도 바뀌고, 표점도 제법 많이 찍혀 있었다. 거기에 맞춰 필자의 해설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전체적인 특색은 크게 변함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대로 소개한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쟈클린의 눈물로 듣는 순례자의 노래, 《수원 방랑》
《수원 방랑》은 왜 이렇게 쓴 것일까? 가혹한 삶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소리’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힘없이 죽어가고 있는 자의 신음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끊어졌다가 간신히 이어지는 그 소리는 대부분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어법語法이 맞을 리도 없다. 그런 소리가 어떻게 살아있는 자의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낭송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시인은 특별한 기법을 채택한다. 음악의 힘을 빌려 독자와의 정감 교류를 시도한 것이다. 《수원 방랑》은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쟈클린의 눈물 – 길 위에서〉 등등, 소제목이 모두 음악과 관련이 있다. 〈쟈클린의 눈물〉, 우리나라에도 제법 알려진 오펜바흐의 첼로 연주곡이다. 그 곡을 틀어놓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보시라.
방황을 낭만으로 승화시켜 주는 그 멜로디,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가르쳐주는 그 첼로 곡을 조용히 듣다 보면, 고린내 진동하는 그 악취가 바로 나 자신의 것, 우리들의 것, 우리 삶의 모든 구석진 곳에서 풍겨오는 슬픈 아름다움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인의 가슴에 흐르는 통곡의 눈물도 보인다. 우리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해진다. 쉼표가 하나도 없는 만연체의 산문 시집 《수원 방랑》은, 〈쟈클린의 눈물〉과 함께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 아름다운 슬픔의 노래로 변신한다. 신부님이 걸어놓은 마법의 장치다.
시집 《수원 방랑》은 그 안에 수록된 단편 시 〈수원 방랑 1,2,3〉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단편 시〈수원 방랑 1,2,3〉은 방랑의 기록이 아니다.
‘수원’도 방랑의 장소가 아니라 순례길의 따스한 쉼터다.
2019년 초, 수원을 떠나게 되자 신부님은 이 시를 쓰면서 지나간 세월을 회상한다. 전쟁터에도 꽃은 피어나는 법. 뇌리에 소환된 추억은 따스하고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만나면 그저 반가운 사람들, 정든 뒷골목 비좁은 막걸릿집. 사람의 냄새를 맡고 민중의 숨소리를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수원’은 울고 있는 그대에게 빛의 멜로디를 들려주었고,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거리의 슬픔을 안아주는 밤의 꽃”이 되어주었다. ‘대물 뱀장어’ 같은 노숙인과 함께 오래된 시집, 인스턴트커피 한 잔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따스한 저녁노을빛이었다. [ 주 1 ] 시집의 이름을 《수원 방랑》이라고 지은 것도 그 따스한 빛을 잊지 못해서 아니었을까.
그러나 ‘수원’은 동시에 ‘고난의 순례 구간’이기도 하다. 거기에 이 시집의 참된 가치가 있다. 《수원 방랑》은 필경 쉼터에서의 따스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난의 길에서 부른 순례자의 슬픈 노래인 것이다. 이 순례길에는 실상實相의 세계에서 걸어가는 실천의 구간도 있고, 기도와 명상의 세계에서 걸어가는 사유의 순례 구간도 있다. 시인의 그 순례길을 뒤따라가 보자.
사제 시인이 노숙인을 돕는 수원시 다시서기지원센터장의 직책을 맡아 실상의 세계에서 걸어가는 이 순례길은 여기저기 죽음이 널려있는 참혹한 전쟁터다. 신음소리와 함께 죽어가는 자들의 모습이 종군기자의 보도사진처럼 리얼하게 펼쳐진다. 《수원 방랑》은 〈쟈클린의 눈물〉 선율이 애잔하게 흐르는 퓰리처 사진 전시회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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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 ]〈수원 방랑 1, 2, 3〉·〈울고 있는 그대에게〉·〈몽마르트르 언덕에서〉·〈알람브라 궁전에서〉· 〈대물 뱀장어〉 참조.
전시회장의 맨 앞에 걸린 ‘사진’은 〈블랙야크〉.
히말라야 맹추위가 닥쳐오자 수원역으로 몰려드는 노숙인들. 사람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거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내 사랑하는 그대가 아닌 것처럼, 모르는 척 지나간다.”
그때 신부님에게 문자가 온다. “노숙인 춥지 말라고 텐트 좀 사주세요.” [ 주 2 ] 사람이 대大 우주인 다른 행성의 은하수에서 온 외계인 같은 어느 ‘정신과 의사 놈’이 아내 몰래 후원금을 보내온다. 덕분에 춥고 어두운 순례길은 한 줄기 빛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나 시인이 이 순례길의 맨 앞에 블랙야크 텐트를 쳐놓은 이유는 독지가의 후원을 바라서가 아니다.
‘생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허연 죽음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한발 한발 처음으로 올랐던 고상돈 에베레스트 1977년 살아 돌아와야 하는데 수원역에 텐트 두 동을 쳤다. 말이 필요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 〈블랙야크〉에서
시인은 말한다.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렇다. ‘생존’이야말로 《수원 방랑》의 키워드다.
사제 시인은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다.
“자본주의냐 삶이냐!” 어느 슬로건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명/생존’의 대척점에 ‘자본주의’가 서 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지, 이데올로기는 시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관심사는 ‘삶’이다. ‘생명’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명제는 무엇일까?
범인凡人들은 돈과 권력을, 국가는 민주라는 단어를 숭상한다. 대학이 주로 내거는 구호는 진리, 자유, 평화, 정의 등등이다. 하지만 나는 ‘생명’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삼은 장공 김재준 선생님의 생각에 격하게 공감한다. 제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한 명제라 할지라도 존재가 사라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원 방랑》은 생존의 방법과 생명의 가치를 찾아 나선 순례길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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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2 ] 〈아틀라스〉 참조. '아름다운의원' 정두훈 원장님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소금 같은 분이시다.
두 번째 ‘사진’은 〈스텝 회의〉다.
수원역 부근 옛날 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어느 명절을 앞두고 센터장인 신부님이 스텝 회의를 가지는 장면이다. 회의의 내용은 무엇일까. 결론은 무엇일까.
수원역 노숙인 현장은 자본주의에 의해 무시로 생명이 사라지는 전장戰場이다. 그곳에서 열린 회의라면 의제가 무엇이든 결국 ‘살아남기 작전회의’나 다름없다. 그러나 회의는 하릴없이 끝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차피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무한경쟁 시스템이다. 필연적으로 노동시간, 산업재해, 실업과 불평등을 야기한다. 설령 모두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5~10%는 '루저'가 될 수밖에 없다. 의지 상실, 우울증에 걸려 자살률과 사망률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태생적으로 끊임없는 슬픔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론대로라면, 능력이 뛰어나면 ‘가진 자’가 될 수 있고, 열심히 노력하면 극락 천국 ‘SKY캐슬’의 주민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 이치로 능력이 부족하고 게으르면 5~10%의 루저로 도태될 수밖에 없단다. 정말인가? NO! 거짓말이다.정말이라면 우리의 신부님이 그토록 분노하고 절규할 리가 없다.
이 땅에서 그 ‘능력자’의 실체란 무엇인가? 독립군 잡아 족치던 친일 매국노들의 후예가 대부분 아니던가! 반대로 어느 광야에서 삭풍을 맞고 싸우던 독립군 후손들은 출발선이 뒤처져 “전철에 끼어 숨지고 기계에 갈아져 나오고 길에서 옥상에서 굴뚝 위에서 절망을 토해낸다.” [ 주 3 ] 그러다가 실업자가 되고 노숙인이 된 것이다. 이 지독한 모순과 불평등 구조 속에서 어찌 아니 분. 노. 하며, 어찌 아니 통. 곡. 하랴!
“하늘이시여!
공평무사하고 늘 선한 이들과 함께 한다더니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러고도 당신이 옳다는 말입니까?”[ 주 4 ]
맑고 고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비명에 가고, 도척盜跖 같은 무리들은 삼대三代에 이르도록 잘 먹고 잘 사는 모순을 지켜보며 하늘을 향해 분노하고 절규하던 사마천司馬遷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사제 시인은 한없이 답답하다. 블랙야크 텐트를 쳐서 히말라야 추위에 살아남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이 모순과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해결하여 실업자와 노숙인 없는 세상을 만들 방법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답이 없고 길이 없기 때문에 회의는 언제나 하릴없이 끝난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수원 방랑》은 또다시 그 ‘생존의 방법’을 찾아 길을 떠난 순례자의 고뇌가 담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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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3 ]〈SKY캐슬 1〉 참조.
[ 주 4 ] 사마천, 《사기史記‧백이열전伯夷列傳》 참조. 유시민 님은 2024. 2. 14. <매불쇼>에서 바로 이 단락을 거론하며 하지만 사마천은 끝내 그 해답을 얻지 못했노라, 생물학적으로 침팬지 사회를 이해해야 알 수 있노라고 말했다. 나는 유시민 님의 박학다식함을 매우 존경하지만 그 말만큼은 문제가 있다. 사마천은 같은 글 안에서, '천도 天道'가 무엇인지 분명히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마천이 만약 울분만 토하고 말았다면 《사기》가 그렇게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인정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제시한 '천도'는 바로 '역사 정신'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사진 전시회장에는 여기저기 “꽃 한 송이 고개 떨구고 팔랑거리던 나뭇잎 흙으로 내려오는”[ 주 5 ] ‘귀천歸天의 사진’이 유난히 많다. 방 한 칸 없어 수원역 맴돌다가 지원센터가 구해준 보증금 100만 원 월세 7만 2천 원 원룸에 감격해하는 ‘여인의 사진’도 걸려있다. [ 주 6 ]
그러나 감격도 잠시뿐, 그녀가 유방암으로 죽었다. 시인은 애인 하나 장만하지 못하고 쓸쓸히 떠나간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안쓰럽고 허망하다. 자본주의에 뒤틀린 이 땅의 삶이 끔찍하기만 하다.
길은 끝나지 않는 공포의 현장이며 포구는 잠시 증오가 쉬던 곳이며 오랜 성은 오를 수 없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 중략 … 생존은 미래가 없어 전쟁 중이며 희망은 사라지고 죽을 수도 없는 삶은 감춰진 달콤한 유혹 가득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의 슬픔입니다.
-〈여행〉에서
시인은 침통하게 중얼거린다. 생존은 미래가 없다고. 자본주의에 희생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기도하고 위로해 주는 것일 뿐. 사제 시인은 기도한다. 재수 없이 다음 세상에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소박하게 노동해도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에 가시라고. 그곳에서 봄날이 오면 빛나는 춤을 추시라고 축원해 준다. [ 주 7 ]
삶이란 그래도 봄날에 초대받은 소풍 같은 것. 그대들과 함께 놀러 와서 행복했노라고, 기왕지사 소풍 왔으니 "사이다라도 한 잔 먹고 가시라"고 위로해 준다. [ 주 8 ]
《수원 방랑》은 야수野獸가 된 자본주의에게 생명과 존엄성을 잡아먹힌 이 땅의 민초들이 죽어가는 순간을 포착한 슬픈 사진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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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5 ]〈아틀라스〉 참조.
[ 주 6 ]〈달달한 그녀〉 참조.
[ 주 7 ]〈상갓집에서〉‧〈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소풍〉‧〈허수경 산문집〉 참조.
[ 주 8 ]〈소풍〉참조.
다음에 걸린 ‘사진’ 제목은, 〈삶〉이다.
아니, 이게 뭐야. 똥 싸는 모습이잖아? 구리구리 퀴퀴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막는다. 시인은 왜 이런 모습을 〈삶〉이라고 이름 하였을까? 너무 시니컬한 것 아닌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을 떠나보낸 그가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자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궁금해진다.
아들아 집 나올 때 똥 싸고 나오너라. … 중략 … 지랄 같은 것들에게 아갈머리에 잡혀 찢어지지 말고 똥이나 시원하게 누면서 살아라. … 중략 … 천년을 뒤돌아보아도 단 하루아침이나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 중략 … 길지 않은 인생길 살다 보면 혹시 아느냐. 기분 좋은 일 생길지 모르니 집 나올 때 꼭 똥 싸고 가거라.
신부님도 참 나 원. 꼭 이렇게까지…. 나도 모르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문득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겠다는 생각에 진지해진다. 엉거주춤 여기저기 기웃대는 그 모습들, 온갖 눈총 다 주면서 사방에 자물쇠 철컥 걸어 잠그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그렇다고 싸지 않을 수는 없는지라 에라 모르겠다, 후미진 곳에 퍼지르다 들키면 더 난리가 난다.
그들 입장에서 바라보니 은근히 화가 치민다. 어쩌라는 것인가! 노숙인은 똥도 싸지 말라는 것인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에 수록된 〈폭염〉이 생각난다.
38도 올라 열 받은
호텔 뜨겁지도 않지만
수원역 뒷길 고가다리 밑
신문 깔고 누운 바닥은
폭염 속에서도 시원한 정자다.
일당 까먹고 기둥을 등져
장한 홍두깨 허공을 향해
청량리 588 옥탑방 고운 여인
입술 흥건히 촉촉한 생각 고여
간만에 시원하게 사정을 끝내고
두리번 헐거워진 바지에 묻을까
하루치 광고 찢어 대가리 닦아도
흔적을 지우는 일은 쉽지 않다
가슴 아리도록 웃픈 실존이다. 죽지 못해 아직도 남아 있는 욕망이 서럽다. 지나가는 여인의 눈에라도 뜨인다면 “으악, 변태!” 소리 지르며 신고할지도 모른다. 가장 원초적인 본능마저도 해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에 시인은 중얼거린다. “천년을 뒤돌아보아도 단 하루아침이나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생명’이란 단순히 ‘숨을 쉬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도 보장받지 못하는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수원 방랑》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잡아먹는 장면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준다. 이 야수를 속히 인간화시키지 않으면 조만간 우리 모두가 잡아먹힐 것임을 ‘미리 보기’ 기능으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은 〈장 선생님〉. 어느 상갓집 ‘사진’이다.
한때는 잘 나가던 노숙인 장 선생님, 밤낮으로 혼자 술 처마신다. 요양병원도 거부하던 그가 죽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대기업 부장 아드님이 있었나 보다. 갑자기 그가 나타나 후줄근한 병원에 안치되어 있던 주검을 서둘러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긴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진 슬픔 주체할 수 없어”, 공사다망한 조문객들이 몰려드는 “잘 차려진 상갓집”을 꾸민다.
노숙인과 대기업 부장 아드님. 단절된 그 부자 관계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장 선생님〉은 “삐끗하면 노숙으로 떨어지는 아리슬슬 흔들 위태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마저 흔들리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노숙인들은 대부분 주구장창 신경정신과 병원 신세를 지면서 환자들하고만 지낸다. 의욕을 되살리고 싶어도 “약 기운 때문인지 그게 안 된다.” 도시의 현대인들도 비슷하다. 혼밥 혼술을 즐기는 이들이 점점 많아져간다.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연락처를 주고받고 싶지도 않은 ‘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오늘 밤 친구 하면서 같이 라면이나 먹을 수 있는” 수준의 관계라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 주 9 ] ‘삶’이란 타인과의 관계와 관계로 촘촘하게 이어진 ‘인드라의 그물 indrjala’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그물망을 자르고 관계를 차단한 ‘나 혼자만의 삶’은 이기주의다. ‘생명력이 없는 삶’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생명’이란 타인과 어깨동무하며 더불어 사는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빛을 발산하는 것. [ 주 10 ]
《수원 방랑》은 삶과 생명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순례자의 따스한 생명 교향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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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9 ]〈신 인간관계론 1, 2, 3〉 참조.
[ 주 10 ] 수원 노숙인 대상으로 진행한 인문학 프로그램에서는 '노숙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어깨동무 프로그램'이라고 작명했다.
《수원 방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사진’은 〈살처분〉이다. 조류독감으로 닭과 오리가 살처분되는 광경이 아니다. 구제역 방역으로 살처분되고 있는 수백만 마리의 돼지도 아니다. 이 땅의 수천만 민초들이 살처분되고 있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경제 권력이 정치권력보다 훨씬 더 커졌다. 군사독재시대에서 자본독재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기업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의 생명권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가 살처분되고 있다. 자본의 세계에서 계속 진화하고 있는 이 교활한 바이러스로 인해 이 땅 곳곳에서 대량 살처분이 진행 중인 처참한 ‘사진’이다.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22세기는 올 수 있는가?”
최근 독일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는 그 말이 생각난다.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살처분 중이라는 얘기다. 이미 수많은 지성인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유엔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는 이대로라면 인류의 지속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고, 하빌랜드 W. A. Haviland와 같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는 인류가 친親자연 친 인간적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지구 인구가 100억을 돌파하는 2050년을 마지노라인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아예 시한까지 못 박아 예측하고 있다. [ 주 10 ]
지속가능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많은 사람들은 ‘환경’을 꼽는다. 지구 온난화와 엘니뇨현상으로 태풍, 가뭄, 산불과 같은 천재지변이 잦아지며, 인구 폭발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고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인류의 지속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그 모든 요인의 기저에는 자본주의가 있다.욕망은 무한한데,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다. 그런데도 자본주의는 마치 물질적 성장이 끝없이 지속될 것처럼 행세한다.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하는 주범인 것이다. 《수원 방랑》은 인류가 생존의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일깨워주는 생명의 알람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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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1 ] William A. Haviland, 《文化人類學》, 496쪽 참조. 중국어판, 上海社會科學出版社. 2006.
마지막 ‘사진’은 창문이 있는 곳, 창가다.
기도와 명상에 잠긴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창가는 시인이 하늘과 만나는 길목이며, 쓸쓸한 영혼을 살찌우는 곳. 시를 쓰며 매일 새롭게 서원誓願을 하는, 텅 빈 겨울처럼 가난한 사유의 순례 공간이다. [ 주 12 ]
가난한 백성 아픈 세상에 부디 이 약초 드시고 고운 임 아픈 곳 낫게 하소서. 지친 사람 한 모금 마시면 명약이 되게 하소서. 겨울 이기라고 귀한 임에게 보낼 사람도 없지만 해마다 약초를 담근다. 살포시 손잡아 주고 싶은 사람. 가느다랗게 뛰는 맥도 확인하고 첫새벽에 길어온 맑은 물에 약초를 달여 먹여야 한다. 살고 싶다는 저 깊은 눈망울을 보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 한 철만 더 같이 살다가 바람과 벌판과 산과 폭풍우 지나가는 모습 보이고 싶다. -〈약초〉에서
시인은 소망한다. 죽어가는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약초를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그런 신비의 명약이 어디 있겠는가. 고뇌하던 시인은 스스로 ‘천종산삼’이 되고자 한다. 히말라야의 정기가 담긴 천종산삼 한 알의 씨앗이 바람에 들키지 않는 인연으로 이곳 머나먼 골짜기에 던져지기를, 그래서 당신 자신의 인내의 고행과 열정으로 영글어지기를, 하늘과 맞대응한 생명의 영약이 되기를, 자신의 헌신과 희생으로 생존의 길을 찾는 일에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주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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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2 ]〈창가에서〉 참조.
[ 주 13 ]《그대에게 연을 띄우며‧천종산삼》참조.
《수원 방랑》,
그 사유의 순례 길에서 듣는 생명 교향곡은 ‘기도와 서원의 노래’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61편의 작품이 수록된 《수원 방랑》 중에서 유일하게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쓴 작품이다.
이 시는 자본주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신부님 자신의 마음에서 들려온 내면의 소리라는 뜻이리라.
외로웠다고
푸른 별 지상에 오시던 날
쓸쓸한 것은 그대만이 아니었나니
대우주를 놀라게 한 최상의 선택입니다
풀잎의 새벽
이슬을 정갈하게 위로하던 날
잃어버린 사랑 고개 들어 갈망하나니
날마다 가난을 밝히는 별이 그립습니다
은하수 장하듯
가고 오던 수도자 창창히 빛나며
까불지 말라고 소곤 반짝 웃음 짓나니
그리운 님 얼굴 볼 수 있어 고요합니다
바람 불어와
억센 손 거친 밥 그대 아름다워
뒤돌자 혼자라도 없던 길 만드나니
텅 빈 겨울도 봄날 기다리는 별입니다
- 〈성 프란시스 수도회 키릴 수사님 종신서원에 부쳐〉 전문
종신서원을 한 키릴 수사님에게 바친 시다. 외롭고 슬픈 우리 모두에게 불러주는 생명의 노래이자, 사제 시인 스스로의 다짐과 서원이기도 하다. 시인은 먼저 사유의 순례길에서 깨달은 생명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푸른 별 지상에 오시듯, 우리가 이 땅에 생명으로 탄생한 것은 대우주를 놀라게 한 최상의 선택이었노라고. 그리고 다짐한다. 날마다 가난을 밝히는 별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면서 이 땅에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놓겠노라고.
그렇다. ‘가난’이 답이었다. 인류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인류가 다음 세기에도 생존하려면 ‘적은 것’과 ‘작은 것’ 속에 내재된 정신적 충일함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가난하게 살아야 희망이 보인다는 이야기다. 물질적 가난함 속에서 정신적 즐거움과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 주 14 ] 그것이 삶의 본질이요, 생명의 실체인 것이다.
'가난'은 대한성공회 소속 성 프란시스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이다. 그러나 아득한 은하수와 허허로운 바람 부는 대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리라. 그리하여 사제 시인은 매일 종신 서원하듯 매일 새롭게 다짐한다.
이 순례길은 동반자도 드문 법, 혼자라도 없던 길 만들며 가겠노라...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텅 빈 겨울일지라도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봄날을 기다리는 별이 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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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4 ]E. Schumacher,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1973)와 M. Lester, 《지속가능한 사회》 (2000) 참조.
<계속>
[ 표지 사진 ]
◎ 세 번째 시집 《수원방랑》의 표지입니다.
◎ 다음은 신부님의 삼부작 시집에 대한 마무리 소회와 신부님이 추진하셨던 '어깨동무 인문학 프로그램'의 남은 이야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