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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숲 May 25. 2021

모유 수유의 기억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케이크를 먹으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왈칵하는 느낌이 났다. 설마 양수가 터진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일이 아직 꽤 남았던 터라 반신반의하면서 병원으로 갔다.


의사 내진 결과 내 자궁문은 벌써 2센티나 열려 있었다. 양수가 터진 상태라 24시간 안에 진통이 오지 않으면 응급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출산 가방조차 싸 오지 않은 나는 몹시 당황했다.


다행히 진통이 찾아왔고, 초산임에도 불구하고 길지 않은 진통 끝에 출산했다. 문제는 출산 직후부터였다. 내가 다니던 병원은 24시간 모자동실을 하던 곳이었다. ‘24시간 모자동실’이라는 말이 병원 곳곳에 있었지만 그 뜻이 뭔지 잘 몰랐다. 그 말이 출산 직후부터 산모가 아기를 24시간 돌봐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일인지 출산 전에는 몰랐다. 2박 3일간의 모자동실은 끔찍했다.


출산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은 나에게 간호사는 모유 수유를 하게 했고, 준비되지 않은 내 몸과 갓 태어난 아기는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밤에는 같은 병실에 있는 아기들이 돌아가면서 울어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생애 처음 모유 수유란 걸 시작했던 내 가슴은 피딱지와 피멍으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퇴원하는 날 나는 좀비 상태로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했다.


산후조리원에 도착한 뒤 출산 후 처음으로 잠을 푹 잤다. 친구들이 조리원에서 가면 무조건 수유 콜 받지 말고 밤잠을 푹 자라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가슴에 피멍이 낫자, 나는 다시 아기에게 맘마를 주는 도구로 기능해야 했다.


결혼 전 나는 엄마와 여동생 앞에서 옷 갈아입는 것조차 꺼렸다. 대중목욕탕은 당연히 가지 않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찜질방을 가더라도 샤워는 집에 와서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의 몸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목욕탕이나 찜질방, 그리고 운동 후 탈의실에도 다른 사람이 탈의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황급히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랬던 내가 출산을 하자마자 내 가슴을 만천하에 까발리게 되었다. 이상하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라는 단어로 묶인 모든 사람이 그 행동을 했고 나 역시 특별히 거부할 수 없었다.


이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매일 모유 수유 지옥에 시달렸다. 새벽이면 통증과 젖몸살로 119 버튼을 몇 번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며 살았다. 이후로도 수천 번도 더 모유 수유를 했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 가슴이 아기의 맘마 제공 도구가 된다는 사실도 내내 불편했다. 사회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어떤 공간에서든 편하게 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나는 엄마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 인가하는 자괴감만 들었다.


단유를 하자 내 일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겹게 먹었던 미역국과 사골국은 뒤로하고 매일 밤 좋아하던 술과 안주로 배를 채웠다. 급히 체중이 늘어났지만 그것보다 정신적으로 충만해진 것이 더 위안이 됐다.


자연분만과 모유 수유, 출산하는 여성에게 부과되는 과업들. 내 주변에서 누구도 나에게 권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모성’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았다. 아기를 자연분만으로 낳아서 뿌듯했고, 꾸역꾸역 모유 수유를 해내서 후련했다. 나는 왜 뿌듯하게 후련했을까. 제왕절개와 분유 수유를 한 엄마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가. 이중 잣대는 누가 만든 것일까. 출산한 여성에게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살아 돌아와서 축하한다는 인사 정도만 전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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