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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울었던 날, 바다로 떠났다.

힐링미 암환우 수기

by 힐링미
ⓒunsplash

#처음으로 울었던 날


동네에 있는 수원 G유방외과에서 유방암으로 판정되어 대학병원에 제출할 의뢰서를 받아올 때 울지 않았다.

동네병원에서 써 준 의뢰서를 들고 천안 S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았을 때도 울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환자와 의료진 등 보는 눈이 많으니 눈물을 꾹 참을 수 있다 쳐도

진료를 마치고 집에 와서 혼자 있을 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빠의 대장암, 엄마의 유방암 이력이 있다 보니 내게도 “올게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담담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잔잔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점심을 준비하다가 눈물이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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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수술 후 예전처럼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까?”

처음 대학병원에 가서 담당 교수님 진료를 본 후, 검사일정을 잡고 온 게 다였다.

아직 유방암 몇기인지 나오지 않았고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도 듣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다가 눈물샘이 터졌다.


“유방암 수술 후 예전처럼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까?”

“교수님께서 내게 살 날이 많지 않다고 선고한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엄마보다 딸인 내가 먼저 죽으면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울컥울컥 하였고 점심 준비로 채소를 다듬던 손이 다칠라

칼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서 눈물과 콧물을 닦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울면 안 돼. 그러면 점심 못 먹어.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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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울 날이 많겠지,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 잠시 상상 속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다가 현실로 빠져나왔다.

현실에선 난 배가 고팠고 재료 손질을 얼른 마무리한 후 야채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했다.

그렇게 짧지만 굵게 울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더 울 날이 많겠지, 이제 시작인데.


점심때 울음의 연장인지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이전에 쓰던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첩을 보고 싶어졌다. 추억에 잠겨서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배터리가 10% 남아 충전해야 한다며 깜박깜박 신호를 주는데 무시하고 사진을 넘겨 보았다.

5년간 썼던 휴대폰이었으니 사진첩에 쌓인 사진만큼이나 추억들도 많았다.

주로 카페에서 바다를 찍은 사진이 많았는데 사진만 보아도 어디인지 다 기억이 났다.


여기 참, 좋았었는데...

오른쪽 유방을 수술하면 한 동안 장거리 운전을 못 하니 바다를 보러 가지 못하겠구나...”

추억소환 하다가 밤 꼴딱 새겠네. 그만 자고 내일 바다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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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떠났다.


유방암 수술 전 모든 검사를 마쳤고 결과는 1주일 뒤에 나온다.

1주일이 참 길게 느껴질 거 같아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1박 2일로 혼자 강릉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영진해변 C카페

경기도 수원에서 3시간을 달려 아침 11시에 도착한 영진해변에 위치한 C카페에서는

중년의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다.

C카페의 첫인상은 앤티크 한 가구들이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따스한 느낌을 받았고

여기에 어울리는 따뜻한 라테를 주문했다.


요즘 카페 답지 않게 여사장님이 직접 자리로 음료를 가져다주셨다.

지금은 2월이니 추운 겨울인 건 당연한데 내가 추워 보였는지 따뜻한 물 한잔도 같이 주셨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많지 않아 혼자서 조용히 물멍을 하였다.

여긴 다음에도 또 오고 싶은 곳으로 낙점하였다. 여행의 시작이 좋다!


점심은 회덮밥을 먹으러 갔다.

회를 좋아하지만 좀처럼 혼자서는 잘 먹지 않는 음식이다.

유방암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한다면 날 음식은 피하라는 정보를 알고 나니

회를 미리 먹어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은 청개구리 심리가 발동했다.

그것도 이 식당에서 가장 비싼 2만 원짜리 모둠회덮밥으로 주문했다.

밑반찬은 종류가 많지 않아 아쉬웠지만 메인요리인 덮밥에 회가 가득해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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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강릉에 사는 현지인에게 입소문이 난 아파트 상가 내에 있는 작은 동네 빵집으로 갔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먹지는 못하고 저녁에 먹을 생각으로 사기로 했다.

오후 늦게 가서 그런지 사고 싶었던 맘모스빵도 크림빵도 다 팔려서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식사대용으로 가능한 샌드위치와 야채고로케,

그리고 정체를 잘 모르겠지만 폭신해 보이는 빵은 호기심에 입가심 디저트용으로 샀다.




사천진해변 H카페

빵집에서 나온 후 사천진해변에 위치한 H카페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 3시경인 이 때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기에

오션뷰를 만끽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아니더라도 창가자리에 앉을 수 있는 확률을 따져 이곳에 오게 되었다.

예상대로 나이가 지긋하신 3명만 앉아 있었고 이후 나가시면서 나 혼자 독차지하게 되었다.

가지고 온 책은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고 신이 나서 바다 사진을 연신 찍었다.

그러나 달콤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커플들이 들어오면서 명당자리에 앉아 있는 게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카페에 온 지도 2시간이 다 되어 가니 이제 이 커플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겠구나 하며 카페를 나와 숙소로 향했다.




caroline-badran-2F5N-dOy5go-unsplash.jpg ⓒunsplash

급하게 잡은 여행이라 강릉은 숙소비가 비싸서 오픈특가로 뜬 속초에 새로 생긴 숙소로 예약했다.

강릉에서 속초까지 1시간 남짓 달려서 동명항이 반쯤 보이는 객실로 배정받았다.

짐을 풀고 낮에 샀던 빵이 혹시나 상하진 않을까 냉장고에 넣은 후

의자에 앉아서 오늘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휙휙 넘겨 보았다.

빵은 주식이 아니라 후식 개념인 나에게 저녁을 빵으로 대체하려고 하니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다른 것도 먹고 싶었다.

치킨이 먹고 싶은데...

결국 치킨을 포장해 왔고 그날 저녁 빵에 치킨에 과식을 했다.

먹다 남은 빵은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까 생각했는데

다른 빵도 아니고 샌드위치의 야채가 상해서 배가 아프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스쳐 입속으로 넣었다.

굿바이~ 강릉




ⓒunsplash
그렇지만 이번 여행은 나답지 않은 여행이었다.

1박 2일 동안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일단 날씨가 도와줬고 오션뷰 카페에 가서 모두 창가 자리에 앉았으며

식당에서 먹은 음식들도 모두 맛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은 나답지 않은 여행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선 예민하지만 입맛은 무뎌서 아무거나 잘 먹고

대전을 가도 성심당 빵집을 가지 않는 내가 빵집을 가다니.

바다를 좋아해서 강릉엔 수십 번 갔지만 회보다 떡볶이에 김밥을 더 많이 먹고 온 나인데

이번엔 굳이 비싼 돈을 내며 회덮밥을 먹고 왔다.


암 환자가 되면 음식을 가려 먹어야 되는데 빵도 회도 치킨도 수술 전에 다 먹어두고 싶었나 보다.










*'영'님이 보내주신 힐링미 암 환우 수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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