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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Dec 05. 2022

영화 후기 : 가재가 노래하는 곳 (7)

자연의 또 다른 이름 2

그래서 테이트와 체이스의 사랑에 대한 방식도 흥미로웠다. 테이트는 카야가 살아온 방식으로 접근하는 반면, 체이스는 첫 등교 때 흥미롭게 바라보던 시선처럼 뜻 모르게 접근했다. 카야의 입장에선 테이트에게 더 풍부한 감정을 느끼고 공감을 느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인간이 노래하는 ‘사랑’의 감정이 아닐지라도. 카야가 이곳 습지에서 살겠다고 한 다짐은 환경에서의 습지와 더불어 자신과 습지를 동일시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에 긍정하듯, 테이트의 접근은 정말 아름답고도 자연의 어느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았다. 화려한 수컷 공작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암컷의 시선을 끄는 것처럼, 암컷 반딧불이가 어떠한 이유로 불빛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체이스의 사랑이라고 다를까. 폭력성과 소유욕이 테이트에 비해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사실 어떤 동물 혹은 생물들에게도 이러한 면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생각을 하고 행동하지 않기에-그렇다고 믿기에-그것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래서 체이스의 접근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달콤했다. 체이스를 보며 어쩌면 모든 생명의 무의식엔 ‘외로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은 그것을 인식하며 명명했고, 그 외 생명은 애초에 유전자에 기록된 채 태어난 것이지. 흔히 말하는 본능에 말이다. 제 이익만 채우려고 하는 체이스의 속내는 카야의 입장에선 이기적인 것이지만, 반대로 보면 당당한 주장이라는 것도 재밌다. 참으로 본능에 충실하고 제 이익을 최대화 시켜 많은 결과를 얻는 것. 체이스가 영리한 생물로 성장하여 고상하고 품위있게 포장할 줄 알았다면, 적어도 공작새의 행동을 따라했더라면 이 둘은 나름 서로 원하는 결말을 얻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생각을 조금 보탠다면 카야에게 있어 테이트든 체이스든 두 사람이 준 것은 절대 사랑이 아닐 것 같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고난의 환경에서 성장한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시선일 뿐 자연에서 사는 생명의 시선에선 살아가는 과정 중 하나의 선택과 결과일 뿐 그것이 고난은 아닐 것이다. 양육자의 보호를 받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것이 아니니까. 오로지 사회에서만 양육자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불가피한 상황에선 모든 생명이 스스로 보호하며 자신만을 믿고 알아서 살아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고 방향이다.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왜 인간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걸까. 왜 그것에 감정과 의미를 부여할까.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그것으로 어떤 확연한 차이점을 가진 결과를 낼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인간의 사랑은 동물의 사랑과 결과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사랑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분명 표면적으로 주고받는 것은 애정인데, 왜 그럴까. 달콤한 노래가 깔리지 않아서일까? 배경이 습지라서?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라서? 살인사건이 발생해서?

     

결국 화자는 사랑이란 것을 인간만이 가진 특수한 감정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닌 주체만 다를 뿐 모양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고 있었다. 나의 감정을 뒤흔드는 상대로 인해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다른 생명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감지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한다는 것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체이스와 테이트의 사랑은 카야의 선택으로 죽음이 되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이 보여준 것이 사랑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사랑이라고 해석하더라도 이상하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진부한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영화는 오직 카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테이트의 행동이 무척 사려깊은 것도 사실이고 체이스가 무례한 사람인 것도 확실하지만 카야라는 인물은 정말로 묘하다. 왜 나도 이들의 표현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영화는 카야의 삶을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거기에 카야로 대표되는 자연의 삶과 인간의 본성이 큰 차이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도 말하는 것 같다. 아무튼 사람의 탈을 쓰고 인간의 언어를 한다는 것만 다를 뿐, 두 사람의 사랑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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