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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엄 Jan 23. 2024

일 년 만에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얼마나 아픈지 눌러보니 아직은 아프다.

추석을 앞두고 1년 만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하는 중에 핸드폰에 찍힌 '엄마'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받고 싶지 않아 두세 번 폰을 뒤집었다. 그런데도 계속 울려대는 벨소리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곱 번 울릴 쯤엔 엄마가 핸드폰을 잘 못 누르거나 나를 놀리려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기본적인 전화에서조차 배려받지 못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지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를 치유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있는데 절묘한 시점이다. 이것이 끌어당김의 법칙인가?

그러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카톡을 보내셨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며 주소를 달라 신다. 우리 집에 오시겠다고. 그리고 집에도 오라고 말이다.

사실 이혼하고 이사했을 때도 우리 집에 와보지 않으셨다.

"아니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어떻게 딸 집에 한 번도 올 생각을 안 해? 멀지도 않구먼."

하며 서운함을 표현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있어봐라."


'그래. 아버지 눈이 좋지 않고 바쁜 일도 있으시겠지'라며 나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마트 가는 길처럼 가까운 우리 집을 두고도 오시지 않는 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상황인가. 이혼하고 자식들과 살아가는 첫 집이 아니던가. 신혼 때 살았던 집이라고는 하지만 살림살이들은 다른데 어떻게 궁금해하지 않으신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더 그랬다. 큰아들 대학이 정해졌을 때도 혼자 대학 주변을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왔다. 아들이 가는 곳이라면 관심이 갔고 궁금해했다. 자식이 잘 되려면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나였기에 부모님의 지나친 무심함의 쿨한 부분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화해를 청하는 문자를 보내셨지만 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참았던 서운함과 버려졌다는 느낌까지 더해지니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가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내며 마음속에 든 생각.


'죽어버리면 이 꼴 저 꼴 보지 않을 텐데.'

'안된다. 나는 살아서 내 아들들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


내 속의 에고와 이성적인 내가 서로 다투며 믿기 힘든 3분을 보냈다. 내 분노에 내가 당하고 있는 것 같았고 멀리서 엄마라도 만난다면 어디로든 뛰어들 것 같았던 느낌까지 들어 무섭기까지 했다.

감정이 무식하게 날뛰고 있어 진정시키기 어려웠지만 긍정의 주문을 외워가며 나를 다독였다.

5분 정도 지나자 차분해지며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근시간에 큰아들에게 전화해 부탁했다.

"미안한 부탁이지만 할머니께 전화해서 엄마한테 찾아가지 말라고 말해줘. 엄마가 힘들었어."


큰아들은 떨리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고 할머니에게 전화할 테니 힘들어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그 일이 지나갔다. 진정시키기 어려웠고 내가 나를 죽일 것 같은 공포스러움에 그 주에 나는 마이산을 다녀왔다. 기도하고 산책하며 기분을 전환시켰다. 마이산을 출발하는 아침에도 '친정이 불편하다'에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에 눈물을 쏟으며 내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에 안심하며 좋은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부모님은 잘 모르시는 것 같다. 큰아들이 할머니와 통화했을 때도

"너희 엄마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를 잘 모르겠구나." 하셨다던데 그때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제야 내 분노에 대해 부질없음을 느꼈다.


고모는 부모님이 네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모르니까  이야기해줘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건 너무 가혹하다.

내가 아픈 이유를 설명하고 내게 아픔을 주었던 상대를 이해시켜야 하다니.

내가 아픈 것도 이제야 알았고 내가 괜찮아진다는 것도 진행 중인데 상대에게 나를 이해시키기까지 해야 다니. 그건 하기 싫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내가 극복해야 할 감정이고 나머지는 상대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지금은 나에게만 집중하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단어인 '죽는다'를 생각해봐야 했다. 말이 씨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단어를 계속 내 안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일도 많고 살아갈 날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 안의 있는 에고를 파헤치다 못해 분해해 버렸다. 자꾸만 죽는다는 말로 나를 협박하고 지배하려 하니 그런 에고는 없애버려야 했다.

죽는다는 언어대신 나를 살리는 언어로 바꾸고 나쁜 언어는 버리되 그런 감정은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이니 나를 알아주고 존중할 필요는 있었다.


그런 말들이 서슴없이 나왔던 것은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나를 인정하고 진정시키는 좋은 단어로 순화시켜 생각해내야 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건 서러움 때문이었다. 그 서러움들을 조금씩 표현하고 살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무식하게 혼자 참고 묵혀두다 쉬어빠져 흐물 해진 김치처럼 형체가 없어져버렸다. 내가 힘들어하는 형체를 알아야 표현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들이 올라오는지조차 몰랐으니 힘들면서도 갑갑했을 것이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만 남들은 내게 관심도 없다. 부모님도 자식이 화난 이유를 모르지 않던가. 바라지 말자. 내 안의 감정들을 정리하는데만 집중하자!


내가 무너졌던 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받았던 식구들의 반응이었다. 내 형제에게서 받았던 배신 같은 서러움과 그것을 알고도 가만히 두고만 보았던 부모님에게 서운한 것이었다.

부모님도 다 큰 자식들의 신경전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런 점을 이해하지만 힘들었던 순간 나를 보호해주지 않은 식구들에게 버림받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 점을 나는 소화시켜야 한다.


체했던 그것이 완벽히 소화되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나아진다는 느낌이다. 찌르면 여전히 아프지만 전처럼 우는 게 아니라 화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내 안에 갇혀있던 부정성을 빼내고 다독이다 보면 찔러도 아프지 않은 날이 올 것 같다. 아직은 더 소화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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