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에서 일한 지 8년 차다. 모나미 볼펜밖에 몰랐던 문구용어는 많아졌다. 같은 볼펜이라도 수성펜이 있고 유성펜이 있으며 네임펜이라도 굵기가 다르다는 건 일해보지 않고는 모를 내용이다. 번아웃이 오면서 그만두었던 문구점을 2년 만에 귀환해 여태껏 일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감사하다. 나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주는 곳이 있다는 게 말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일을 하면서 잡생각 없이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안정감을 느끼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필연인 듯 문구점은 내게 감사한 인연이 되었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나를 느낀다. 쉬지 않고 동동거렸던 일중독자에서 유쾌하게 글 쓰는 과장이 되기까지. 내가 봐도 많은 것들이 편안해졌다. 쉬는 날이 어색했고 일하는 게 편했던 시간에서 휴일을 알차게 보내며 글을 쓰는 나를 만나기까지의 이야기가 있다.
6년 전 컴백했던 매장엔 신학기가 시작된 3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일하게 된 시기도 3월이었다. 문구점에서 제일 바쁜 달은 3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신입생이 입학하는 시기다. 거기다 매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매장이 이전하고 몇 개월이 지난 상태였지만 정리해야 할 것들은 많았다. 굵직한 매대는 자리를 잡았지만 자잘한 물품 정리는 시작 수준이었다. 출근해서 일주일 동안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위치를 파악했고 여러 가지를 새롭게 익혔다. 아침부터 퇴근시간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몸이 힘들다는 생각보다 알찬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성취감이 느껴지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정리된 줄 알았던 것들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매장에서 일하던 과장님이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는 거였다. 과장님은 문구점의 초창기 멤버로 10년이 넘게 매장에서 근무했던 분이셨다.
전날 밤에 꿈을 꾼 게 생각났다.
멀리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하얗고 높은 파란색 파도는 해변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변에 당시 근무했던 과장님과 매장에 언니가 서 있는 거였다. 큰 파도는 시련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상한 꿈이었다. 나는 매일 밤 꿈을 꾸며 꿈도 잘 맞는 편이다. 하지만 해석을 하지 못해 일이 생기고 나서야 꿈에 대해 해석하는 편이었다.
“저 이제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아니 갑자기 왜요?”
"그렇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과장님은 매장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 어떤 뒤처리도 없이.
어젯밤 꿈이 해석된 순간이었다. 그날 휴일이어서 쉬고 있던 매장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과장님이 갑자기 그만뒀어.”
“그래?”
“그런데 언니! 내가 간밤에 바다에서 큰 파도가 밀려오는 꿈을 꿨는데 과장님이 서 있었어. 그런데 그 옆에 언니도 서 있더라.”했더니
“야! 너 돗자리 펴라. 나도 그만두려고 했어. 과장보다 내가 먼저 그만두려고 했는데 의리도 없이 먼저 그만뒀네.”
“뭐?”
한 순간에 매장을 지키던 윗분들이 없어졌다. 그것도 2명이나. 나는 이제 겨우 매장의 물건을 파악했고 아직도 할 일은 많았으며 혼란스러웠다. 당시 매장에는 사장님과 사모님인 실장님이 다른 지역에서 매장을 운영하고 계셨다. 여기 매장에는 사장님이 상주하지 않으셨고 그만두는 2명과 남자직원 3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급하게 다른 지역에 계신 실장님께 전화했지만 한숨만 쉬실 뿐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내가 없는 동안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지났던 문제는 지나갔기에 괜찮았지만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아무런 조치도 없이 상사 2명이 없어지니 내 마음은 진열되지 않은 물건처럼 정신이 없었다. 전에 일했던 2년은 매장업무였는데 갑자기 카운터를 맡으며 전체적인 일을 해야 했다.
남아 있는 직원들은 많아야 경력 1년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는 남자직원들이었다. 문구점의 특성상 경력이 있어야 많은 물건들을 알 수 있고 일도 잘할 수 있다. 그런데 거의 초짜 수준의 직원들 뿐이다.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알아야 할 게 많았던 나인데. 직원들 앞에서 모르는 일도 아는 척해야 했고 타 지역에 계신 실장님께 물어가며 많은 일들을 진행시켜야 했다.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남자직원 중에 1년을 다녔던 배송직원이 갑자기 의욕적이 되었다. 한마디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의견을 무시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도매처의 서류를 손보다가 실수를 하는 등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리더역할의 부재로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선봉이 되면 일은 엉망이 된다. 어설픈 일처리로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힘들었지만 나서기도 애매했다.
문구점도 배송을 한다. 주로 업체를 상대로 하는 배송이라 각자의 코스가 정해져 있다. 두 사람이 나뉜 구역으로 배송을 가면 되는데 전체적인 상황을 알아야 하는 나는 오늘 배송이 어딘지 물었다. 그러자 그 배송직원이
“배송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누나는 누나 일 하세요.”
뭐라고? 순간 빠직했다. 그래? 내 할 일을 하라고?
배송코스를 카운터에서 모른다는 것은 전체 일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있을 수 없다. 알아서 하겠다고? 그래 좋다. 나는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배송일지를 만들어 배송할 곳을 적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배송일지를 만들었다. 그날 배송해야 할 곳과 배송직원의 이름을 적게 했다.
"앞으로 배송일지에 각자 배송할 곳과 이름을 적으세요."
없었던 배송일지의 등장에 당황해했지만 며칠을 사용해 보더니 배송지가 한눈에 보여 편하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남자직원을 길들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본사에서 머메이드 종이가 왔다. 머메이드 종이는 여러 개의 색깔이 있는 큰 도화지로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많이 사용하시는 종이다. 도착한 머메이드지는 배송해야 할 물품이라 따로 빼놓아야 했다. 그런데 배송직원은 종이를 체크도 하지 않은 채 제자리로 올리려 했다. 그래서 그 직원을 불렀다.
“머메이드 종이 업체에 배송해야 할 물건 아니에요?
“그런가요?”
“내가 머메이드 종이 나갈 거니까 빼놓으라는 말 못 들었어요?”
“아 그래요? 나중에 할게요.”
“뭐? 나중에 한다고? 물건이 지금 왔는데 나중에 하겠다고요?”
중저음의 공격적인 내 말투에 본인도 화가 났는지 대들기 시작했다.
“누나! 요즘 나한테 왜 그래요?”
“뭐라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건데 나중에 하겠다니. 지금 나하고 한 판 해보자는 얘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당장 종이가 나갈 거고 눈앞에 보이는 종이를 두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아니면 나한테 종이 수량 좀 빼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그걸 나중에 한다고요?”
“그게 뭐가 이상한 거예요?”
그때부터 직원과 나는 신경전을 펼치며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신경전은 있다. 수동적인 사람이라면 따르면 되지만 일을 차고 가는 사람은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생각하는 일은 바로 해야 하고 성질도 급해서 무엇이든 빨리 해내야 한다. 없는 체력에 온갖 용을 쓰며 악을 쓰고 살았는데 여기서도 그래야 했다. 나를 보호해 주는 이 없고 보호받을 상황도 아닌 차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용했던 매장에 둘 사이의 싸움으로 잠시 시끄러웠지만 배송직원의 물러섬으로 그날의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먼저 밖을 나간 배송직원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고 그때부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었던 다른 직원들도 눈치껏 알아서 행동해 주었다.
싸운 다음 날 창고로 불러내 배송직원에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주어진 일이쟎아요. 전의 과장님도 그만둔 상황인데 이러면 서로 힘들어져요.”
“죄송합니다. 저도 여기서 계속 일해야 해요.”
“그래요. 계속 일해야지요. 하지만 나보다 잘할 수 없다면 나를 따라줘야 합니다.”
“네”
배송직원의 공손히 모은 두 손은 나의 승리를 말해주는 몸짓이었다.
이 일을 실장님께 보고했고 실장님은 사장님께 말해서 조치를 취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억지로 과장이 되었다. 싸웠던 배송직원은 나와 몇 개월을 더 일하다 그만두었지만 나쁜 감정은 없었다. 알고 보니 호기로운 30대 초반의 남자였고 허술했지만 마음만큼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장을 달고 몇 년을 일하는 동안 몇 명의 직원들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여야 했지만 저 때의 고성은 없었다. 그런 고성이 있다면 나와 직원 중 한 사람은 그만두어야 한다. 보통 직원이 될 가능성이 많지만 팀을 이끄는 책임자는 신경전에 능해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작은 매장에 직원 3명이어도 팀이 아닌가. 팀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한 사람의 마음이 상해버리면 나머지 사람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을 중재해 줄 누군가가 책임자인 것이다. 하지만 책임자 자리는 피곤하다.
누구에게나 갈등은 피하고 싶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조그만 감정싸움조차도 싫다. 하지만 그런 갈등 없이 평화와 정리도 없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만 관리자는 그럴 수 없다. 중심을 잡고 멀리 나가려는 사람에게 말로 해서 되지 않으면 싸워서라도 중심 가까이에 둘 수밖에 없다. 중심 가까이 두어야 분열 없이 한 팀으로 갈 수 있다. 일도 해가면서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직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역할까지 해내야 했다.
어쩔 땐 억울하다. 괜한 책임감으로 일도 많이 하고 사람관리도 하며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것이 매장을 관리하며 일하는 과장의 업무이자 역할이다. 괜히 관리자일까. 그래서 체력이 좋아야 하고 멘탈도 좋아야 한다.
직원들이 바뀔 때마다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은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맹수에게 먹이를 뺏기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때도 있고 고양이 같은 눈으로 따뜻한 시선을 보여야 할 때도 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 하는 만큼 삶의 기술과 지혜도 늘어간다. 이런 삶의 기술과 지혜를 알아가게 되어 다행이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기술은 몸으로 부딪혀 익히고 지혜는 뼈에 새겨 무의식에 새기는 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일하게 된 문구점에 뜻하지 않게 과장이 된 문구점 이야기.
지금은 여기서 꼭 일해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이곳에 익숙해지기까지 쉽지 않았다. 일밖에 모르던 일 중독자에서 글 쓰는 과장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적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