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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n 08. 2023

일제시대 근대화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둘러싸고 학계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식민지 수탈론, 하나는 근대화론. 수혜론은 워낙 대놓고 식민주의를 긍정하는 거라 제식갤 같은 소수 일뽕들만 빼면 동의하는 여론이 없기도 하고 근대성론은 수탈론이나 근대화론 만큼이나 인지도가 있는 이론은 아니기에 일부러 뺐다. 사실상 한국 사학계의 식민지 근대 해석은 허수열, 신용하를 중심으로 한 수탈론자들과  안병직,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론자의 논쟁 속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수탈론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 시절의 모든 유산(?)을 비판하는 것이기에 도덕적 정당성 측면에서는 근대화론 같이 식민지배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주장하는 이론보단 점수를 얻기가 쉽다. 게다가 실제로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으로 한반도를 병합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이 점은 근대화론자들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또 일제시기 동안 어찌 되었건 일본 식민 당국이 인프라를 만든 것은 지배자의 편리성을 위함이라는 것 또한 근대화론자들이 제대로 반박하는 걸 보지 못했으며 그렇게 생긴 근대의 물질적 유산들도 대부분 한국전쟁에 파탄났다.


그러나 이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게 일제가 과연 물리적인 힘으로만 조선을 지배했는가? 애당초 전세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배의 공통적인 문제는 바로 지배 계층이 피지배자인 원주민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다는 점을 맹목적 수탈론자들은 간과했다. 물론 무기야 식민지군이 훨씬 강하지만 다수가 들고 일어난다면 곤란해진다. 실제로 3.1 운동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는 이대로 무단통치가 진행되면 곤란하다고 일기에 쓰면서 일본 측의 강경 진압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그래서 일제가 선택한 것은 협력자를 늘리는 방식이었다.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은 2~3%였고 대부분 도시에 거주했기 때문에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총독부는 협력자들을 늘리기에 조선 왕조에서 천대받던 중인 계층을 공략했다. 그런가 하면 '영구병합'이라는 목표를 위해 협력자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만들 근대적 법제도를 도입해 모던보이들의 정서를 자극하고 근대적 도시들을 건설한 것이다. 특히 법 제도의 근대화는 이영훈 교수가 한국 민법과 시장경제의 뿌리를 아예 1912년에 공표된 <조선 민사령>에서 찾을 정도로 근대화론자들의 일제 시대 동안 근대화가 이뤄진 중요한 증거로써 자리잡는다.


하지만 근대화론자들이 간과하는 부분도 있다. 분명 일제시대 동안 물론 좋은 방향은 아니었지만 근대화가 이뤄졌고 신분제 잔재가 해체되고(사실 이것도 말이 많은데 팩트는 일제는 선택적으로 효율적 행정을 위해 신분제를 해체시켰고 완전한 잔재가 없어진 건 6.25 이후다) 식근론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근대법과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만 이것도 할 말이 많다.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의외로 간단한데 쉽게 말해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식민지배가 행복감을 주는 체제로 인식되었는가"이다.


이는 분명 식근론 초기 시절 이영훈도 어느정도 회의가 있었던 부분이다.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이영훈은 한용운이 자유의 논리로 일본 검찰을 감복시켰다며 일제시대는 본질적인 자유가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위안부에 대해서도 <제국의 위안부>랑 비슷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그래도 이때까진 일본군의 전쟁범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특히 <반일 종족주의>가 출간된 이후부터 이영훈은 일본 극우를 대변하는 논리를 펼치며 과거 자신이 인정했던 부분을 뒤엎고 근대화론을 버리며 서서히 수혜론으로 기울어갔다.


결론적으로 일제 식민지배는 결코 행복감을 주지 못했다. 일제가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이걸 내세우는 식근론자들의 근거가 조선민사령의 사유재산제도인데 참고로 일제는 자유주의 경제를 한 적이 없었으며 말기에는 아예 통제파-신흥재벌-혁신관료들이 손잡고 독일, 소련식 계획경제의 영향을 받은 통제경제를 펼쳤다. 애초에 일제말 식량 공출보면 전혀 시장스럽지도 않고 자유주의 같지도 않다. 물론 사유재산제도가 시장경제의 근간이긴 하나 계획경제라고 사유재산이 없는 것은 아니며 조선회사령을 통해 조선인 회사 설립을 방해하고 이를 풀은 후에도 독자적인 자본을 형성할 만큼의 조선인 민족 부르주아가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 토지조사사업이 농민들의 것을 강탈한 게 아니라는 것, 이건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신용하 교수의 '한 손엔 피스톨, 한 손엔 측량기' 발언이나 조정래 <아리랑> 속 총살 장면은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토지조사사업이 해방 이후 농지개혁처럼 농민들이 자작농이 되었는가? 일제 시기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으며 조선인 지주도 있었지만 그들은 민족 부르주아이기 힘든 구조였다. 쌀 수탈도 공식적으로는 수출이 맞고 조선 농민들이 이득을 보게 되었다는 구조도 100% 틀리진 않지만 식근론자들에게 쌀 수출이 그래서 소작농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물어보면 대부분 대답을 못한다. 지주들이 혜택 겠지.


당장 일제 시대에는 조선 농민 뿐만 아니라 일본 농민의 삶도 굉장히 비참했는데 조선 농민이 근대화의 혜택을 봤을 거라고? 다이쇼 시대에 무산 정당 운동이 벌어진 것도 일본 농민들의 삶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쌀이 수출되어 일본 쌀값이 폭등하자 쌀 소동이 벌어진 것은 일본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모를 리가 없으며 농가 부채 총액은 1930년 기준 40억 엔을 넘어섰다. 소작 쟁의는 1933년에 4,000건을 넘어섰으며 쇼와 시대 초기 도호쿠 대기근이 벌어지자 각 농촌의 가정들은 딸을 유곽에 팔아넘기고 결식하는 아동이 늘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이는 농촌 출신으로 고향이 황폐화되는데도 재벌과 화족들이 외면하면서 부패만 저지른 것에 분노한 청년장교들이 황도파로 결집해 훗날 2.26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다.


결국 식근론자의 가장 큰 문제는 일본제국의 근대를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에 있다. 일본의 근대가 낳은 모순이 국체론 논쟁으로 이어지고 이후 천황기관설에 대한 반발과 메이지 헌법의 통수권 조항 결함이 군국주의의 씨앗이 되어 파멸의 길로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 근대를 그렇게까지 미화할 필요는 없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식근론자들이 일제시대가 낳았다고 하는 유산인 시장경제도 사실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민주화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일본식 통제경제에서 미국식 시장경제로 나아가게 되면서 자리잡은 거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이 두 개를 모두 극복할 새로운 사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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