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후 10세기 그루지야 지역민들은 언어를 만들었다. 이후 몽골의 침략이 있었고 캅카스의 기독교 국가 그루지야 왕국은 해체되었다. 몽골이 무너지고 카르틀리 왕국, 카케티 왕국, 카르틀리-카케티 왕국, 이메리티 왕국까지 거치다가 1810년 완전히 제정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918년 독립한 그루지야는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는 오세티야인들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소련에 편입되었다. 한동안 소련 치하에 있던 그루지야는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민족 감정을 억눌러야 했으며 스탈린이 지도를 뜯어고치며 게리멘더링 당한 결과 민족 분쟁의 불씨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 그러다가 1986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발표 이후 구 소련권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휩쓸기 시작했다. 그루지야도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는데 이때 크렘린은 남오세티야 민족주의를 밀어줬다. 하지만 1990년 남오세티야의 분리에 대해 그루지야 최고 소비에트는 자치권 무효화를 결정 내렸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다. 1991년 4월, 그루지야는 독립 국가가 되었고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은 현지 소련군 부대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남오세티야를 지원하기 위해 트빌리시를 폭격하려고 했으나 1992년 6월, 러시아와 그루지야는 평화협정을 맺고 남오세티야, 러시아, 북오세티야 평화유지군이 분쟁지역에 배치되었다.
- 이전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일부, 대부분 민족적으로 그루지야인 지역은 그루지야 정부의 지배 하에 남았다. 남오세티야 공화국의 츠힌발리에 기반을 둔 분리주의 당국은 2008년 전쟁 이전에 구 남오세티야 자치주 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했었고.
- 한편으로는 1990년대의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힘 입어 압하지야인들이 그루지야에서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2003년까지 압하지야에서는 그루지야인들과 압하지야인들의 서로 간의 인종청소가 끊이질 않았으며 아예 인구가 줄어들 정도였다. 525,000명에서 216,000명으로 줄었으니 말이다.
- 특히나 그루지야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러시아와 중동 사이의 완충지이며 튀르키예와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전략적 중요성은 러시아의 안보 문제다. 게다가 CIS 국가인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21세기 이래로 서방과 가까워지고 있는 형국 속에서 서방과 중앙아시아가 만약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은 남오세티야보다는 압하지야였다.
- 결정적으로 러시아가 남오세티야를 침공한 건 2004년 장미 혁명 때문이다. 셰바르드나제는 소련 공산당 출신으로 고르바초프 정권 아래에서 외무장관을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러시아와 현실적으로 타협하면서 최소한의 선은 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셰바르드나제 정권 하에 그루지야는 CIS에 가입했으며 적당히 눈치를 살폈다. 물론 이 자도 나토 가입을 고려하거나 유럽연합에도 접근하는 등 친서방 성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당시까지 러시아는 힘이 없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 그러나 2004년 부정선거 의혹으로 전국적으로 벌어진 장미 혁명으로 인해 셰바르드나제는 물러나게 되었고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집권했다. 사카슈빌리는 경제 성장을 위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끌어나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으며 비록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이긴 하나 두번째 임기 때 연평균 GDP는 10% 이상을 기록할 정도였다. 또 구 소련권 국가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마피아를 그루지야 내에서 소탕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괜찮을 지도자일텐데...
- 사카슈빌리는 문제가 매우 부패하고 셰베르드나제 만큼이나 권위주의적이었던 지도자라는 것이다. 정적 탄압도 매우 심한 수준이었고 본인 또한 매우 비리가 많았기에 2013년 3선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로 망명해 오데사 주지사를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포로셴코 대통령이랑 갈등을 빗다가 야누코비치의 프락치로 몰려서 체포, 이내 추방되었다. 2021년 10월, 제발로 그루지야에 귀국한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현재 형집행 정지를 받고 입원 중이다.
- 뭣보다 사카슈빌리는 포로셴코나 젤렌스키 이상으로 상황을 낙관적으로 봤다. 나토,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나. 특히 나토의 가맹 합의를 이끌어내어 러시아로부터 안보 위협을 지킬 발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더 중요한 건 그런 상황 속에서 굳이 남오세티야 자치주에서 독립 찬반투표에 찬성 측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나오니까 배후에서 러시아가 분리주의자들을 조종했다며 그대로 반격에 나선다.
- 2008년 8월 7일, 그루지야군은 남오세티야를 무력으로 공격한다. 문제는 그들이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주둔 중인 츠한빌리까지 밀고 들어와 러시아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인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한지라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챙길 수 있었고 합법적으로 주둔 중인 러시아군을 실제로 선제공격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 물론 러시아가 주장하는 자국민 범위는 논란이 있다. 애초에 자국민이라기엔 대부분이 남오세티야 주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루지야군은 소치 협정을 위반하고 무력으로 공격을 감행했으며 단순한 군사적 점령에서 끝나지 않고 러시아 평화유지군과 남오세티야인, 러시아계 민간인, 친러 성향 민간인까지 건들며 벌집을 쑤시고 다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군사적 배경에서의 그루지야 침공
- 1999년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는 군사개혁에 착수한다. 1996년에 있었던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보여준 추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1개 공수연대로 2시간이면 상황 정리가 가능하다는 국방장관 파벨 그라초프의 주장과는 달리 3일 만에 투입된 BMP 보병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잃고 그로즈니에서만 T-80 전차 68대 중 67대를 잃었다. 게다가 항공정찰과 위성정찰도 예산 부족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첩보가 부족해 체첸 반군이 어떻게 지역 방어를 진행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접근하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 한편 2000년대 러시아는 인구 감소 및 저출산의 문제로 징병자 수가 줄어들자 복무기간을 12개월로 단축한다. 문제는 12개월 만으로는 사실상 전투 인원으로 쓰기 힘들다는 건데 그래서 계약병으로 징집병의 전투력 부족을 해소하고자 했다. 또 다른 중요한 노력은 소련 시대에 부족했던 적절한 NCO 시스템을 군대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 그러던 중 2004년 장미 혁명으로 그루지야에서 소련 공산당 출신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퇴진하고 미하일 사카슈빌리라는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다. 사카슈빌리는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군사비를 8억 7,600만 달러까지 끌어올렸고 GDP 대비 국방비는 2003년 1.1%에서 2007년 9.2%로 증가했다. 이 시기 그루지야군은 CIS권 국가 중 가장 빠르게 군비를 확장하는 국가였으며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로부터 군사 기술을 받아왔다.
- 아마 다들 알다시피 남오세티야 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카슈빌리의 나토 가입 추진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 부시 정권은 그루지야가 튀르키예서 석유를 공급하는 바쿠-트빌리시-제이한 송유관이 있는데다가 러시아와 이란을 우회해서 서방에 대한 가스 공급이 가능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흑해 연안이 완전히 러시아군의 권역 안에 들어와야 했기 때문에 그루지야의 나토 가입은 안보의 큰 위협이었다.
-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이 터지고 전쟁을 통해 러시아군이 더욱 현대화를 하고 재편성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특히나 남오세티야 전쟁 직전 북캅카스 군관구는 가장 최신 전차가 T-72 개량형이었으며 T-80이나 T-90은 없었다. 제42 소총병 사단은 대 비정규전에는 쓸만했지만 정규 전차 전력을 상대하기에는 도태 장비인 T-62 전차만 있었다. 그나마 신형인 BMP-2와 BTR-80도 오래된 장비였다.
- 게다가 러시아군은 GLONASS 없이 정밀 유도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지역의 정전으로 미국이 통제하는 GPS 또한 사용하지 못했다. 특히 전쟁 중 6대의 항공기 손실이 있었는데 그 중 Tu-22M 같은 전술 폭격기도 있었다. 거기다가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과 공군 간 의사소통이 원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서방의 군사평론가들은 러시아군의 남오세티야 행보에 대해 체첸전 시기보단 훨씬 좋아졌지만 결함이 있다고 평했다.
- 특히 블라디미르 볼데로프 장군은 그동안 러시아군 차원에서 키워온 직업 군인들의 전투력이 징집병만도 못하다고 한탄했고 공수부대는 그루지야 방공망을 제압하지 못한 덕에 육상에서 아예 처음부터 밀고 들어갔다. 정찰대대도 도중에서야 배치되었으며 러시아의 어느 군사평론가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5일 동안 러시아 공군은 공중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 그러나 이 전쟁이 러시아의 잃어버린 위상이 어느정도 복구된 사건인 만큼 최소한 평타 이상은 쳤다는 얘기도 많다. 스웨덴 전문가는 흑해함대는 정교한 작전을 수행했다 평했고 차량화소총병 여단은 압하지야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었으며 군사적으로 신속했다고 한다. 확실한 건 총참모부의 계획 및 준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보단 잘 되어 있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