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푸틴 정권 3기가 시작되면서 러시아에서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마련하는 작업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내외 정세는 색깔혁명, 아랍의 봄, 2011년 부정선거 논란과 그로 인해 벌어진 반정부 시위를 거친 상황이었기에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러시아 안에서조차 서구식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국민들 상식을 형성하게 되가자 이에 대응하여 2012년 출범한 조직이 이즈보르스키 클럽이라는 곳이었다. 서쪽의 침입자로부터 러시아를 지킨다는 보루라는 의미에서 에스토니아 근처의 이즈보르스크에 터를 잡은 이 극우 지식인들의 네트워크 조직은 회장인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를 비롯해 작가, 학자, 성직자 등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 러시아의 새로운 통치 질서를 위한 사상과 논리를 고안 및 국제적 차원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푸틴의 책사"라는 이미지를 얻은 알렉산드르 두긴이 존재했다.
알렉산드르 두긴은 한국에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덕분에 본격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인물이다. 그 전까지는 기껏 해봐야 <유라시아 견문>의 저자이자 프레시안이라는 언론의 기자였던 이병한 교수가 직접 인터뷰한 부분이 그나마 보도되던 것 중 가장 상세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두긴은 특히 작년 8월 딸 다리야 두기나가 모스크바에서 테러로 암살된 사건으로 더더욱 조명받게 되었으며 수염이 잔뜩 나있는 특유의 외모 덕분인지 서방에서 두긴은 제정 러시아 시대 비선실세였던 라스푸틴에 비유되곤 한다. 실제로 국내 언론에서 두긴에 대한 기사들을 살펴보면 푸틴의 브레인이나 정권의 실세 뭐 이런 타이틀이 계속 따라붙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래서 한국 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에서 두긴은 21세기의 라스푸틴으로 평가받는 중이다.
그러나 두긴의 세계관이 러시아에 영향력이 큰 것과 별개로 그가 푸틴 정권의 막후 실세라는 평가는 과장된 게 분명하다. 두긴의 사상적 세계관은 형이상학, 역사학 등을 조합한 매우 추상적인 체계로 구성되어 있지만 문제는 푸틴은 철학자가 아니라 현실 정치가라는 점에 있다. 푸틴은 국가 지도자로서 정치적으로 복잡한 맥락을 보이는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에 기술적인 측면이 철학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으며 두긴은 이러한 부분까지 결정을 내려줄 정도로 행정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푸틴 주변의 조언가는 두긴 외에도 여러 명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저번 주권 민주주의 이론에 대해 설명할 때 소개했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전 수석보좌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두긴의 사상적 세계관이 푸틴의 실제 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은 끼칠 수 있어도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두긴이 주목받는 이유는 영어를 통해 해외 매체에 기고나 출간을 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어필하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세계 각지의 우익 포퓰리스트 세력과 연대 및 네트워크를 결성했다는 것에 있다.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다른 참여 지식인들은 러시아어로만 활동하지만 그에 비해 두긴의 영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며 수염이 털보 수준으로 많은 외모는 도스토옙스키, 라스푸틴, 솔제니친 등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러시아 지식인, 성직자 이미지에 매우 잘 부합해서 스타성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긴의 위상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세계관이 매우 중요했다. 그 대안적 세계관은 두긴을 러시아를 넘어 전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렸다.
알렉산드르 두긴은 한국에선 푸틴의 책사, 브레인으로 알려져 있다. 두긴이 쓴 글들을 보면 그가 모호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즐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리우스 에볼라, 알랭 드 브누아, 카를 슈미트 같은 유럽의 극우적 전통주의 사상가들의 견해는 두긴이 단골처럼 인용하는 것들이고 그보다 덜 유명한 프랑스의 르네 게농, 벨기에의 장 프랑수아 티리아르 등 서유럽 신우파 사상가들의 저작 또한 러시아 국내로 수입하는 역할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두긴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에른스트 윙거, 에른스트 니키쉬 등 독일의 초기 파시즘, 즉 보수혁명론의 사상가들도 몇 명 발굴해서 소개했고 일찍이 신페이거니즘을 신봉하기도 했다. 또 반유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었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과격한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표출하기 보다는 정반대로 카발라의 신비주의적 성격에 관심을 가지는 쪽이 되기도 했다.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의 가장 큰 강점이 있다면 그 사상이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종합적인 시야와 서사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보통 러시아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맥락과 지적 전통을 이해해야만 접근이 가능한 다른 러시아 철학과는 달리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는 기본적으로 지구, 대륙, 해양과 같은 공간 관념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 역사 해석을 통해 서사를 쌓는다. 두긴의 논리 바탕에는 하이데거와 슈미트, 에볼라 등이 있지만 의외로 두긴이 제시하는 서사 자체는 단순하다. 두긴은 명쾌하고 단순한 서사를 통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제공해 막강한 호소력을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러시아를 넘어 외부 세계를 감화시킬 수 있던 것이 중요했는데 이 감화 과정이 두긴이 구상한 세계 질서의 실현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극우 사상가라는 점에서 놓치기 쉽지만 두긴은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는 네오나치들의 선전활동을 공공연하게 반대하며 그 활동이 유라시아주의라는 국가 대의를 크게 훼손한다고 비난하는 아이러니함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두긴을 푸틴의 직접적인 조언자이자 막후의 정책 결정자로 인식하기 보단 대안적이고 종합적인 큰그림 또는 세계관을 제시하는 철학자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두긴은 푸틴에 대체로 공감했지만 이따금 비판하기도 했는게 그 이유는 유라시아 제국의 확장을 너무 신중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두긴의 사상이 중요한 것은 러시아 정부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점점 더 우경화되어 가는 러시아 사회가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새로운 극우 사상을 후원한다는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긴의 사상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즈보르스키 클럽을 비롯해 국내 네트워크는 물론이고 러시아 외부의 극우 지식인, 대안우파 행동가들과의 네트워크 연결을 통해 존재한다. 물론 이 네트워크 사상들 간에 여러 차이점은 있지만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제국적 공간에 대한 권위적 통치를 어떻게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논리로 정당화할 것인가라는 목표는 명확한다. 즉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는 이 의제에 매력적인 대안 서사를 제시하여 영향력을 전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유라시아주의는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구 유라시아주의를 계승한 사상이라고 보면 된다. 오늘날 두긴 사상의 기원인 구 유라시아주의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17~18세기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개혁 이후 러시아가 오랜 기간 겪었던 동양, 서양 경계선 사이에서의 정체성 갈등과 19세기의 서구주의, 슬라브주의 갈등 사이에서 탄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세기에 영국은 크림전쟁 이래 수십년에 걸쳐 러시아의 팽창을 차단하고 있었고 서유럽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동양적 전제주의와 야만의 상징으로 멸시하기 일쑤였다. 이 시기 서유럽과 계몽주의에 대한 유사한 불만을 공유하던 독일 낭만주의 사조가 러시아에 유입되었고 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은 서구와 대비되는 독자적인 러시아의 문화와 정체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들의 전통적 슬라브주의는 정교회 신앙의 우월성, 차르 아래에서 공존하는 다민족 제국, 계몽주의에도 굴하지 않는 러시인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도덕성, 농민 공동체의 이상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슬라브주의를 계승한 대러시아 민족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서구 문명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0년대를 기점으로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슬라브주의에서 한 발자국 더 동방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타타르의 멍에는 러시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측면이 있긴 했다. 일례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교통체제인 역참 제도를 도입하여 방대한 영토에 통치력을 재고할 수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여전히 정교회 신앙과 슬라브 문화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근거를 대부분 동쪽에서 찾았다. 가령 러시아는 중국, 인도와 같은 아시아의 위대한 문명과 전통을 공유하고 있기에 서구가 지니지 못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유라시아주의자들 대다수가 생각하는 이런 초원들은 메타자연학적 초원들이고 상상된 세계이지 현실 세계는 아니었다. 게다가 문학계 지식인들의 언어도 몽골어, 타타르어, 심지어 러시아어조차 아닌 프랑스어가 상당수였으며 대부분의 유라시아주의자들도 아시아를 방문하려고 시도조차 안했다. 물론 당연히 중국어나 우르두어를 공부하지 않았었다. 한참 후의 신유라시아주의 창시자 두긴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동부지역 초원들의 신파시즘이 아닌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의 신파시즘에서 원초적 영감을 얻었을 정도이니 그 정도면 말 다한거고. 그나마 아시아계 언어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관심을 가지거나 스텝 지대를 얼마간에나마 체험해본 유라시아주의자를 꼽자면 레프 구밀료프 정도가 아마 끝일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 유라시아주의의 기원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로서 아시아라는 안티테제를 세운 것에 가까웠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잠시 주춤했던 아시아를 향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새로운 해석은 볼셰비키 혁명을 기점으로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국이 무너지고 대혼란이 펼쳐지면서 수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은 망명길에 올랐고 그들은 서구에서 망명자 공동체를 형성했다.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당파에 속했던 백군 계열 러시아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얽매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는데 필요한 이념노선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동안 이반 일린을 중심으로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미르스키, 베르나드스키 등 여러 지식인들은 서구로부터 거부당한 러시아의 경험과 1차세계대전이 서구의 심장에서 만들어낸 참상을 기반으로 서구 회의론을 퍼트리게 되었다. 이들이 이때 만들어낸 세계관이 바로 러시아가 몰락한 유럽도, 유럽의 진보에 대처할 힘이 없는 아시아도 아닌 "유라시아"라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러시아 자신이 유라시아라는 것을 인지할 때 인류 역사 속 동과 서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는 유라시아주의였다.
유라시아주의 그룹의 핵심적인 화두는 슬라브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과 문화의 고유성과 유기적 일체성이었다. 그들은 지리적 공간, 그 위에서 공동체가 형성한 독특한 언어와 문화가 본질적 차원에서는 침해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역사에는 단선적인 발전 단계가 있으며 가장 앞선 서구가 나머지 비서구 민족들을 발전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당시의 일반적 생각에 대한 반론으로 등장했고 특히 유라시아주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는 각 민족은 각자의 고유한 공간에서 자기 나름의 발전과 흥망성쇠의 순환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라시아주의자들이 바라보는 러시아가 지닌 고유성도 몽골-타타르인들의 지배 속에 무슬림, 타타르인, 아시아인, 몽골인 등이 각자의 문화적 원형을 보존하며 큰 틀에서 조화를 이루는 제국적 성격의 러시아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 상이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근간으로 정교회의 역할을 지지하기도 했다. 즉 러시아의 제국적 성격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는 고유성이라는 얘기다.
한 가지 더 설명하자면 1세대 유라시아주의자인 이반 일린은 그러한 맥락에서 서구, 아시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러시아가 순결함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일린에게 러시아 민족은 하나의 피조물, "자연과 영혼의 유기체"이자 원죄를 짓지 않은 채 에덴 동산에 사는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누가 러시아라는 유기체에 속하는지 여부는 세포들이 어떤 신체에 속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러시아 문화는 러시아의 힘이 미치는 곳 어디에나 자동적으로 형제애적 결합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으며 러시아라는 유기체를 넘어선 독립된 개체로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캅카스 같은 것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오늘날 신유라시아주의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공간은 하나의 유기체로 밖에 있을 수 없다거나 러시아가 그 유기체의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고.
카자흐스탄에서 발행한 레프 구밀료프 기념 우표 그리고 이런 원조 유라시아주의를 러시아 망명 지식인이 아닌 소련 국내에서 명맥을 이은 사람이 바로 레프 구밀료프였다. 그는 국내에 <상상의 나라를 찾아서>라는 저서가 출간된 적이 있고 2018년도에 문재인이 러시아 국가두마 연설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듯이 언급하기도 하면서 인지도가 한국에서도 조금 높아진 인물이기도 하다. 구밀료프는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사람이었는데 덕분에 일생의 상당수를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시베리아에서의 생활은 구밀료프에게 유라시아라는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심어줬고 후에 연구자가 되어 역사학, 고고학,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한 그는 러시아의 기원들은 아시아와 유목민족들에서 발견된다는 주장을 증명하려는 여러 저서들과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었다. 또한 구밀료프는 오직 러시아만이 유라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살아남으리라고 보았지만 정작 특유의 아시아 지향적인 접근법 탓인지 러시아 정교회, 소련 공산당, 국수주의자들의 반감을 모두 사게 되었다.
구밀료프의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 역사는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으로부터 받은 제국적 기틀과 통치술을 바탕으로 러시아인들이 유라시아 공간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는 다민족 공동체를 만들며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1920년대 망명 지식인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유라시아주의를 바라본 것이기도 하며 러시아인들에게 "타타르의 멍에"를 가져다 준 몽골인들에게는 호의적인 반면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이반 일린과 마찬가지인 관점으로 어떠한 다민족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고 기생하면서 파괴하는 키메라 종족이라 지칭하는 등 매우 적대적으로 보았다. 실제로 그는 "중세 유대인들의 역사"에 관한 논평들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집단 항의를 받기도 했었다. 거기에 더해 구밀료프의 역사 이론 핵심 전제인 지리결정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사적 유물론과는 너무 극단적인 상극이었기에 자국인 소련 당국으로부터도 온갖 공격에 시달려야 했었다.
이렇게 1920년대 이래 구밀료프까지 쭉 탄압 대상이었던 유라시아주의는 공산권의 몰락과 소련 붕괴 타이밍을 맞으며 드디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구밀료프는 1992년에 사망했지만 러시아인들이 소련 해체로 인해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던 와중에 "최후의 유라시아주의자"인 그의 이론 만큼은 소비에트 연방의 폐허를 마주한 러시아인들에 의해 계승되어 발전된다. 특히 구밀료프는 기본적으로 러시아 애국주의자였음에도 사후에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의 수도 카잔에 동상이 세워진다거나, 카자흐스탄 정부의 우편담당부처가 그의 초상화가 인쇄된 우표를 발행하는 등 비 러시아계 민족들에게도 자신들의 잊혀진 부분을 발굴한 각광받던 연구자로 나중에나마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구밀료프를 계승하여 신유라시아주의를 창시한 이가 바로 알렉산드르 두긴이다.
1980년대 중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분위기 속에서 소련 사회는 결코 자유민주주의에서 희망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로 연방이 커다란 위기에 몰리면서 때마침 이뤄진 사상 자유화와 함께 적백내전에서 백군의 패배를 끝으로 잊혀졌던 극우 사상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졌고 그 시점에서 두긴이 전면에 나선다. 두긴은 원래 나치당 인사였던 "지페르스"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도 했었던 만큼 극우 파시즘 계열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었다. 실제로 1990년에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와 함께 자유주의에 맞선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동맹을 내세운 <경계 없고 붉은 파시즘>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민족볼셰비키당이라는 좌익 파시즘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었다. 물론 나중에 두긴과 리모노프는 갈라서게 되고, 친 푸틴 인사가 되는 두긴과 다르게 리모노프는 아예 반정부운동가가 되어버리는 건 함정.
(참고로 리모노프는 두긴과 결별한 후에도 다른 러시아당을 창당하며 재야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가 2020년에 사망)
민족 볼셰비키당 시절 두긴의 사상적 근원은 어디서 출발했는가에 대한 것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대표적인 사상가만 해도 알랭 드 브누아, 율리우스 에볼라,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슈미트, 플라톤, 헤겔, 르네 게농 등이 언급되는데 특히 브누아, 에볼라, 게농의 사상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이교주의자들었다는 것인데 브누아의 경우에는 계몽주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서구적 기획"으로 여러 민족들이 각자의 문화를 지키고 사는 다양성이 파괴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막기 위해 계몽주의의 기반인 기독교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율리우스 에볼라 역시 힌두교나 티베트 불교 같은 동양 종교를 기독교를 대체할 중요한 지적 자원으로 추켜세웠다. 다만 두긴 본인은 정교회 민족주의자였기에 이교주의 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상가들의 저작을 읽으면서 러시아가 속한 자랑스러운 땅, 동방 유라시아에서 지적 원천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긴의 이론에 대한 글은 너무 추상적이고 현학적이어서 인기가 부족했었기에 오늘날 두긴의 위치까지 오는 것에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두긴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상가로 만들게 된 진짜 이유는 바로 지정학에 대한 평론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두긴의 지정학은 기본적으로 지정학 이론의 용어들을 차용한 다음 유라시아주의, 서유럽 전통주의 우익 사상, 구밀료프 역사 이론을 혼합하여 만든 자신만의 이론이었기에 서구의 지정학과는 결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두긴은 구밀료프와 마찬가지로 지리적 공간과 각 민족, 문화권이 유기적 통합체를 이룬다고 보았으며 민족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각자의 문명적 전통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문명에서의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통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의미와 가치를 느끼며 사는 길이라고 본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이것이 두긴의 사고방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두긴 지정학의 기반은 서구 학계에서 지정학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취급당하는 카를 하우스호퍼라는 학자에게서 나왔다. 이 하우스호퍼라는 학자는 우리에겐 "레벤스라움"이라는 이름의 나치 지정학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할텐데 다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그 시절에 지정학과 관련된 파시스트의 움직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장 원조 파시즘 국가인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 지정학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고 히틀러, 괴벨스는 지정학보다 인종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며 지정학 대신 중심지역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나마 나치당 인사 중에 지정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은 루돌프 헤스 정도가 유일하였고 애초에 카를 하우스호퍼가 육군 참모부에서 근무할 때 집필한 저작들은 딱히 전투적이진 않았다. 요컨대 하우스호퍼는 나치 독일에서 대단히 호평되던 인물은 아니었으며 그의 아내부터가 나치 애들이 열등 인종 취급하는 유대인이었다. 뭣보다 하우스호퍼의 정치학은 그 자체로 본다면 나치의 것보다 급진성이 결여된 더 보수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두긴은 하우스호퍼를 비롯한 원류 지정학의 영향을 받았던 인사인지라 중심지역과 주변지대, 혹은 대륙과 해양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공간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땅과 바다"를 일찍부터 이야기한 카를 슈미트의 철학을 수용했던 두긴은 그것을 지리적 공간 속에서 각 민족이 특징적 문화를 형성한다는 구밀료프의 관점과 접목시켰다. 두긴에게 있어서 인간이 문명적 전통에 따라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모든 전통을 해체하고, 계량할 수 없는 가치를 화폐로 수량화해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올바른 남녀관계 해체, 민족이 갖는 고유성의 혼합화를 통한 제거 등을 일삼는 근대성이었는데 이 근대성을 퍼트리는 주체인 서구 문명이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비서구 사회를 무력으로 지배하고 매판 세력을 육성해 전통과 문화를 오염시킨다는게 그의 생각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두긴과 유라시아주의 상징기 그렇기에 그 근대성의 파괴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해양 세력의 본질이었으며 상업을 통해 힘을 쌓는 해양인들은 이익 극대화를 위해 다른 사회로 침투해 그 사회의 전통적 연결망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드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해양 상업 문명은 언제나 사치, 향락, 도덕적 타락, 다문화주의와 전통의 파괴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며 반대항에서 이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유라시아 대륙의 육상세력이었다. 이들은 돈으로 더럽혀진 해양 세력들과는 달리 화폐로 표준화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들을 믿으며 대륙 여러 민족들 간의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위계질서와 영웅성을 숭상하고 있는 "칼리 유가"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두긴은 21세기부터 해양 세력을 비롯한 글로벌리스트들과 육상 세력을 비롯한 유라시아주의자 간의 대립이 강화될 것이라 보았다. 이는 근대성이 아예 포스트모던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해양 세력의 힘이 더 파괴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긴은 페미니즘, 젠더 이론, 다문화주의가 세계 각지로 확산되어 전통문화를 하나씩 파괴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과학기술이 인간의 생물학적 기반 자체에 개입하리라 보았는데 그렇게 되면 각 민족의 고유성과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자연스러움은 모조리 삭제당할 것이 뻔했다. 만약 글로벌리스트의 그레이트 리셋이 성공한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기존에 있던 가치들은 전면적으로 부정당하며 대중들은 글로벌리스트 엘리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래서 신유라시아주의자들이 희망을 찾은 것은 동방의 육상 세력들의 각성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해양 세력과 근대성을 무찌른 육상 민족 이란인들이었으며 두긴은 이를 바탕으로 유라시아에 자리잡은 각 민족 공동체들이 각성하여 해양 세력을 몰아내고 각자의 문명적 공간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실로 나온 저서가 <지정학의 기초>라는 책이며 여기서 두긴은 러시아가 유라시아 공간에서 올바른 길을 자리잡게 하기 위한 각 지역 국가들에 대한 외교 전략 방침에 대해 세세히 평하고 있다. 처음에 두긴은 유라시아라는 한정적 공간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이익만을 구상했지만 이제는 그레이트 리셋에 맞서 인간성을 사수하고자 하는 투쟁적 지정학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육상 세력들이 서구, 근대성. 해양 세력, 글로벌리즘을 몰아낸 후에 다극 세계를 건설할 것을 주문한다. 다극 세계는 단순히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다른 나라로 분산시키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단일한 가치로서의 근대성이 아니라 복수의 전통이 각자의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서 유라시아와 세계의 재조직을 의미한다. 비록 두긴의 사상적 세계관은 푸틴의 정책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지만 두긴이 체계화한 이론이 러시아를 넘어 서양 대안우파에게까지 상당한 합의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국제정세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모스크바-베이징-뉴델리-앙카라-테헤란의 유라시아 연합을 넘어서 러시아의 칼끝은 알게 모르게 서구 정부의 통치 정당성을 흔드는 계획까지로 이어지는 중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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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 <지정학의 힘>, 아카넷, 2020
알렉산드르 두긴 저, 이원복 편역,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0
곽치섭, <율리우스 에볼라와 근대세계에 대한 반란 -파시즘과 관련성을 생각하며->,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5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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