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결정의 순간, 우리는 종종 과거의 실패에 발목 잡힙니다. "전에도 이직했다가 후회했어요." "저번에도 한 번 해봤는데 잘 안 됐죠." 이런 기억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고민합니다. 오늘은 뭘 입을까요. 외부 일정이 있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옷장을 뒤적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런데요 솔직히 저는 오래 고민한다고 특별한 코디가 나오지는 않더라구요. 결국엔 매번 같은 옷을 고르게 돼요. 처음엔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옷장은 늘 가난하니까요) 어느 날 발견한 게 있어요. 제가요, 저도 모르게 성공했던 날 입었던 옷을 다시 찾고 있더라구요. 제가고르는 건 옷이 아니라, '오늘과 비슷한 순간에 있었던 그날의 나'였어요. 우리는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기반으로 현재의 선택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제가 진행했던 글쓰기명상 수업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세 명의 수강생이 동시에 결석한다는 연락을 했어요. 순간 마음에 쿵 소리가 났습니다. ‘지난 수업이 마음에 안 들었나?‘, ’셋이서 무슨 약속이라도 했나?‘ 머리로는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혹시’하는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물더라구요. 명상을 하며 이 불안을 들여다보니,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어요. 나 빼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친구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일, 중학교 수학여행에서 나 빼고 친구들이 몰래 약속을 정했던 일.
우리는 모두 옷장을 두 개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사실의 옷장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옷장입니다. 매일 아침 옷을 고르듯 우리는 결정의 순간마다 과거의 경험을 꺼내 입어요. 재미있는 건, 실제 옷장에서는 고심 끝에 옷을 고르면서도, 기억의 옷장에서는 손도 대보지 않고 늘 같은 옷을 꺼내 입는다는 겁니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지난여름의 옷을 이번 겨울에도 입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춥다고만 느껴요. 'Perceive' 단계는 이 기억의 옷장 앞에 거울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옷이 정말 지금의 우리에게 어울리는지, 혹은 그저 편해서 입는 건지 물음을 던지는 것. 이렇게 의식적으로 옷장을 들여다보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맞는 옷을 골라 입을 수 있어요. 우리의 결정이란, 과거라는 옷장 앞에서 벌이는 외로운 패션쇼 같은 게 아닐까 합니다. 다만 이번엔 거울을 보며 입어보는 거죠.
만일 우리가 과거의 선택을 ‘성공/실패’, ‘좋아요/싫어요‘가 아닌, 그 선택이 들려주는 다층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PATH의 첫 단계인 'Perceive'는 바로 이 옷장을 열어보고 정리하는 일이이에요. 저는 정리하는 데 세 가지 옷걸이를 사용합니다. 하나의 경험도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걸어둘 때 보다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사실'이라는 옷걸이.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어떤 선택을 했는지. 새 옷의 태그를 읽듯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이 옷걸이는 현재의 결정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2. 그 다음은 '감정'이라는 옷걸이. 그때 느꼈던 불안, 기쁨, 후회 같은 감정들. (이 옷걸이를 통해 과거의 감정을 인식함으로써, 현재 결정을 할 때 감정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성장'이라는 옷걸이. 그 경험이 나를 어떻게 단단하게 만들었는지.(이 옷걸이는 과거의 경험이 단순한 실패로 남지 않고, 현재의 나에게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만일 이직을 고민한다고 하면요 가장 큰 걸림돌은 예전의 이직 경험일 거예요.
'또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자꾸 옷장 문을 잠그려 들 겁니다. 하지만 잠깐, 그 경험을 세 개의 옷걸이에 나눠 걸어볼까요.
1. '사실' 옷걸이에는 이직 6개월 만에 다시 퇴사했던 일을 걸어둡니다. 조금은 차갑고 객관적으로.
2. '감정' 옷걸이에는 당시의 후회와 자책감을 걸어봅니다. 지금도 여전히 무겁게 느껴지는 그 감정들을요.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장' 옷걸이. 여기에는 의외의 것들이 걸려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빠른 의사결정을 배웠고 인맥이 넓어졌으며 경쟁사를 분석하는 안목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경험을 세 개의 옷걸이에 나눠 걸어보면요, 실패라고만 생각했던 6개월이 어쩌면 인생의 전환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마치 오래된 옷을 다른 옷걸이에 걸어두었더니, 전혀 새로운 스타일링이 보이는 것처럼요.
다음 주 수업, 세 명의 수강생들이 돌아왔어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모임에 다녀온 후기와 감기약을 먹어도 떨어지지 않는 기침과 급한 일을 처리한 후의 피곤함을 가지고. 그들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내 안의 오래된 기억들이 지금의 상황에 불필요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저였습니다. 마치 오래된 교복을 지금도 입으려 했었구나… 수강생들의 결석이 단순히 각자의 사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묵직했던 불안이 한 벌의 낡은 옷처럼 벗겨졌습니다. 제가 배워야 할 건, 새로운 옷을 사는 게 아니라 낡은 옷을 벗는 법이었어요.
과거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어떤 기억은 발목을 잡으려 하고, 어떤 기억은 무작정 앞으로 뛰어들게 만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신호들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관찰하고 마주하는 거예요.
결정의 순간, 우리는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피하려는 감정과 뛰어들게 만드는 감정을 분리하여 바라보고, 그것이 지금의 상황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는 연습. 이 과정은 때로는 복잡하고 느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 단순한 탐구가 결국에는 더 쉬운 결정, 그리고 더 편안한 행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결정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지금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 감정은 어디에서 왔고, 지금의 나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이 질문이 여러분의 결정을 한결 가볍고 편안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