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조 마키히코의 추리 소설 ‘백광’을 읽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참자’처럼 동일한 한 사건에 범인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실제 화자에 따라 달라지는 문체가 인상적인 소설이었어요. 선과 악이 얽혀 있고 모든 사람이 범인이면서 범인이 아닌 독특한 구성의 퍼즐 같은 소설이었죠. 일본 소설은 추리 소설일지라도 유미주의 전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구나는 느낌을 받았죠. 그는 꽃을 좋아하는 작가로서 꽃을 소재로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도 능소화와 만다라화가 등장하죠. 아름다운 추리 소설이라는 평가에 동의합니다. 유미주의 추리작가라는 평가가 정말 어울리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내용만큼은 우리의 시각으로 봤을 때 아름답지 않습니다. 일단 처제와 형부의 불륜과 불륜으로 태어난 여자 아이를 치매인 척하던 언니의 시아버지가 죽인다(결국은 자신의 친손녀를 죽인 거죠.)는 설정 자체가 한국인들의 도덕성을 한참 뛰어넘습니다. 아무리 한국 주부가 막장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해도 절대로 드라마화가 불가능한 소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은 한국과 같은 유교 문화 한자 문화권인 데다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고, 근대에는 우리를 근대화시켜준 나라로서 미우나 고우나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 어찌도 도덕에 대한 관념이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싶어요. 물론 우리 독자들도 전과는 달라졌어요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야쿠마루 가루 등의 소설 못지않게 불티나게 팔리는데 이런 걱정도 들어요. 네이버 지식인에 보면 중학생인데 읽어도 되냐라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걸 보면 일본에 어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추리소설이라면 추리 소설답게 재미만을 생각하고 읽는 게 요즘 젊은 사람들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이 소설이 사회파 추리소설로도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의 정서를 치매 걸린(정확히는 걸린 척하는) 시아버지의 정서가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과거가 모든 것이 된다.” 지금 고령화 사회의 덫에 갇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비유하고 있죠.
고령 사회는 추억으로 먹고사는 사회입니다. 미래는 점점 어두워지고 과거는 갈수록 밝아지는 세상이죠. 미래가 어두운 사람들에게는 뭐가 남을까요? 현재를 잊기 위해 쾌락에 탐닉할 수밖에 없죠. 그 쾌락은 결혼한 사람들은 불륜, 결혼하기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통한 가상세계로 집중 탈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아름다운 추리 소설이면서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리얼리즘 소설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책은 추리 소설에 도덕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분들이나 일본과 일본 문화에 열려 있는 분들, 소설은 모름지기 재미와 끝까지 읽어내게 만드는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합니다. 단 교육적인 관점에서 중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에게는 추천하지 못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