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 ‘더 크라운’과 함께 넷플릭스 드라마 중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를 잡아먹은 SF 대작 ‘얼터드 카본’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매트릭스의 세계관에 레이먼드 챈들러 스타일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묘미를 더한 걸작이고요, 나쁘게 말하면 시리즈 1까지는 그럭저럭 볼만 했지만 시즌 2는 망작의 수준으로 전락했던 아쉬운 작품입니다. 국내에서는 2003년 출간된 리처드 K 모건의 소설 ‘얼터드 카본’을 주요 등장인물과 메인 스토리만 따라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추가한 작품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넷플릭스의 SF 작품 중에서 ‘블랙 미러’와 함께 가장 볼만한 시리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1보다 못한 2라는 한계는 있지만 재미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 철학적 생각거리란 점에서 정말 건질 게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1) 신체 교체라는 이 기발한 아이디어
정확한 시대적 배경은 작품 속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대략 지금으로부터 500년 뒤 인류가 마침내 우주 행성에 식민지를 건설한 시점이 배경입니다. 188 광년 떨어진 행성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인류는 지구 본토와 식민지에 광속을 뛰어넘는 통신 수단을 마침내 개발해 냅니다. 성간 우주여행에서는 극저온 가사 상태로 수십 년 간 동면 상태에 번갈아 들면서 이동을 하지만 문제는 급한 일이나 변란 등이 있을 때 본토와 연락하는 길이 문제죠. 그때 등장한 기술이 니들 캐스트입니다. 행성과 행성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인간의 의식을 주고받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저장해 놓았다가 188광년 떨어진 식민지 혹은 식민지에서 지구로 보낸 뒤 얼터드 카본이라 불리는 의식 없는 합성 신체에 의식을 업로드해 새로운, 그렇지만 과거의 몸의 기억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는 정말 기발한 설정이 매력포인트인 작품이죠. 인간의 의식과 몸을 분리해서 늙고 병든 몸은 버리고 새로운 육체로 갈아탈 수 있다면 이건 바로 영생의 실현이 되는 거죠.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므드셀라 족으로 500년 이상 살면서 육체를 10번 이상 갈아탄 사람들이 나옵니다. 본인의 젊은 육체를 계속 쓰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육체로 바꾸면서 남자였다 여자였다 어린이였다 노인이었다 등등 그야말로 수시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인간 기억의 디지털 저장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이때는 가능해집니다. 인간의 뇌 뒤에 칩을 연결해 클라우드에 보관돼 있는 스택에 수시로 백업을 해두어야 합니다. 인간은 죽어도 클라우드에 스택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기억을 갖고 새로운 육체를 계속해서 쓸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해킹 등으로 스택이 파괴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진짜 죽음이 기다립니다. 영구적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신체 교환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단 한 번의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죠. 드라마에서 오르테가 경감과 가족이 믿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체 교체를 거부하며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설교하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바뀌는가?
이 소설과 드라마는 영화 매트릭스에 이어 또다시 데카르트의 주장 신체와 영혼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소환합니다. ‘데카르트의 오류’를 쓴 안토니오 디마지오는 인간의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일원론이 맞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건 ‘현재까지는’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죠. 먼 훗날 과학 기술이 발전되면 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런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요. 신체와 정신이 분리된다면 지난 2004년 말레이시아 카지노에서 벌어졌던 이벤트 ‘마음만은 이팔청춘’ 같은 구호는 완전히 사라지는 거죠. 마음이 이팔철춘이 아니라도 몸은 이팔청춘이 언제든 될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겁니다.
인간이 신체를 마치 옷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인간이란 존재의 정체성은 어떻게 바뀔까요? 우선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준다는 육체 이론은 완전히 파기될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준다는 기억 이론이 좀 더 확실한 설명이 되는 건가요?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기억을 두 명의 신체에 이식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소설에서는 그 부분은 언급이 되지 않지만 드라마 시즌 2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공 다케시 고바치의 기억은 한 흑인 남자에 이식돼 있는 상태에서 다케시 고바치의 동면된 신체에 다시 본인의 기억(물론 동면되기 이전까지만 기억을 갖고 있어 정확히는 같은 기억은 아니지요.)을 주입해 살린 뒤 본인의 분신(무엇이 오리지널이라고 부를지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NFT가 필요하지 않겠나 싶습니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 장면이 나오죠. 이게 이중 육체가 되는 걸로 철저하게 금지됩니다.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와 인류의 특수 부대인 유엔 평화군이 파견되어 있는 식민지 행성에는 이중 육체 금지가 엄격하게 작용됩니다. 걸리면 둘 중에 하나는 영구적 손상(폐기)이 되는 일이 벌어지죠. 정체성에 관한 세 번째 이론을 적용해볼까요. 관계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관계 이론은 이런 미래에도 유효할까요? 관계는 육체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정신적이고 기억에 의존한 것이니 정체성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미래 신체 교체가 가능한 시점이 오면 바뀐 육체의 인간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신체의 기억이 누구의 것인가? 그 기억을 갖고 있을 때 쌓아 놓은 인간관계들이 그대로 유효한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거죠.
지금 같은 기술 수준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상상조차 못 할 일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주인공의 여동생(여동생 역시 실체 신체가 아닌 빌려 쓴 육체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이 신체가 바뀐 오빠를 정확히 알아보는 씬이 등장합니다. 관계 속의 타자는 그 사람을 기억할 때 분명 그 사람의 외모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여동생은 귀신 같이 알아보죠. 그 이유는 느낌과 어머니의 유물이라는 징표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죠. 이렇게 인간이 신체를 수시로 교체하고 남의 육체를 빌려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배설 행위도 하는 세상에서 법체계 및 도덕 체계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의 체계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사형제는 의미가 없고요, 일단 태어난 이상 그리고 돈만 있다면 영구적으로 살 수 있기에 인류는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늘어나는 인류를 소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우주 개발에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한된 땅과 제한된 자원에서 살고 있는 지구는 폭발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억이 정체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잣대가 된다면, 기억이 영구 보존되면서 사실상 영혼의 역할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책과 드리마에서처럼 기억의 디지털화가 반드시 필요하겠죠. 그러나 기억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의 감각과 당시 머리에서 하고 있던 생각까지 포함되는 광범위한 인식 행위로써 만약 디지털화해서 다운로드화하려면 반도체 기술에서 AI반도체 같은 특별한 기술이 등장하지 않는 한 도저히 물리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용량의 하드디스크가 필요할 겁니다. 현재로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죠.
3) 잘 만든 이 SF 대작 원작과 비교하면?
원작은 먼 인류의 식민지에서 죄를 지어 200년 형을 살고 있는 특수 부대원을 지구에 살고 있는 500세를 넘은 젊은 부호가 자신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쳐 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추리가 전개되는 전형적인 하드 보일드 탐정 소설입니다. 지구의 배경도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포함한 베이 지역으로 베이 지역을 모델로 ‘빅 슬립’ 등의 걸작을 남긴 레이번 드 챈들러의 오마주로 생각하며 작품을 쓴 듯합니다. 작품은 이 기본 줄거리와 기본 등장인물에 새로운 캐릭터와 재미나는 에피소드 무엇보다 소설에는 없는 세계관을 추가해 극적 재미를 더욱 높였습니다. 소설에서는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는 다케시 고바치의 개인적 이야기입니다. 그가 200년 동안 동면에 들어가는 징벌을 받은 이유에 드라마는 더욱 집중했습니다.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죽음을 극복하고, 빈부격차는 더욱 극심해지는(신체 교체를 하려면 그리고 기억을 영구 보존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 테니 죽지 않는 자는 돈 많은 자일뿐이죠.) 상황에서 생명체의 섭리 즉 생자필멸을 반드시 이루게 해 달라는 명분에서 반란군이 세력을 규합합니다. 이들이 지구와 지구에서 보낸 특수 부대와 싸우는 시나리오가 추가됩니다. 주인공 고바시는 이들을 진압하던 특수 부대 요원이었는데, 반란군의 리더에 감화되어 반란군으로 변신하게 되죠.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여동생을 포함해 주인공 고바시 다케치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룬 점이 드라마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어떤 로맨스도 없지만 드라마에서는 소설에서는 없는 캐릭터 여성 반란군 지도자와 주인공 다케치 코바시의 사랑, 오빠를 빼앗겠다는 생각이 둘 사이를 질투하는 다케시의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여동생 그리고 의뢰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의뢰인의 300세 넘은 그러면서도 언제나 젊음을 유지하는 부인과의 밀애 등 드라마는 19금답게 무척이나 선정적으로 비칠 대목들이 많습니다. 소설은 그런 로맨스가 전혀 없습니다. 로맨스는 시각 매체에 어울리죠. 소설에서는 없는 격렬한 폭력신과 함께 보는 재미를 배가하는 효과가 분명 있습니다. 사실 폭력은 언어로 묘사하기 힘듭니다. 마치 주인공의 생각과 사변이 영화 카메라로 포착하기 어렵듯이 소설의 언어로는 폭력성을 추상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죠. 이 드라마의 폭력은 어쩔 수 없이 거칠지만 때로는 로맨스와 연결돼 섬새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눈살 찌푸리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죠. 드라마 시즌 1에서 등장하는 코바시와 순전히 임무 차원에서 일로 연결이 되었다 나중에 통하는 오르테가 경감과의 로맨스도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넷플릭스는 확실하게 성인 취향 맞죠,
소설에 비해 드라마가 더 매력적으로 느낄 여지는 소설에서는 그냥 단순한 로봇처럼 등장하는 지구에서 코바치가 머물 때 호텔을 운영하는 인공지능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비중이 높아져서 위기 때마다 코바치를 도와주고 중요한 미션을 처리할 때 큰 역할을 하죠. 특히 가상현실 기술을 수시로 구사해 다케치에게 일을 맡긴 뱅크로프트의 은밀한 악행의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주면서 보람도 느끼고 그리고 남몰래 사랑도 느끼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드라마에는 이처럼 소설에서 따온 메인 줄거리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활용해 시청자들의 오감을 만족시킵니다. 소설처럼 주인공의 내면 심리에 집중하지 않고 미래라는 프레임 속에 시청자들이 빠져들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올 수도 있는 첨단 기술의 세계에 흠뻑 젖어들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메타버스죠. 마지막으로 시즌 2는 왜 평가가 안 좋을까요? 이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흑인으로 육체를 갈아 탄 코바시 다케치의 캐릭터에 몰입이 잘 안 됩니다. 그리고 시리즈 1에서 죽은 것으로 나오던 반란군의 여전사를 부활시킨 점, 그리고 고바시 다케치를 제거하기 위해 실제 육체를 소환하는 등 조금 억지스러운 구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몇 갖지 단점들 빼면 상당히 잘 만든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넷플릭스의 실패작으로 기억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우수한 작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