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에도 카페, 과외, 학원, 논술 첨삭 등의 알바를 전전하다 졸업 시즌이 되었다. 휴학까지 합쳐 5년의 대학 생활 동안 여러 경험을 했다.
한량 같은 놈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뻔도 하고, 어설픈 솜사탕 같은 연애도 몇 번 하고, 찌릿찌릿한 가슴앓이도 몇 번 했다.
졸업반임에도 내 미래는 불투명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엔 학점이 턱없이 부족했고, 공무원은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공부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기엔 자존심도 허락지 않았지만, 딱히 들어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만사가 귀찮았다. 학창 생활을 했는지, 직장 생활을 했는지 헷갈릴 정도로 지쳤고, 목표인 졸업을 이뤘으니 쉬고 싶었다.
건너뛰고.
현재까지의 마지막 알바는 초등학교 사서교사였다.
운명이길 바랐고, 운명인 줄 알았지만, 살다 보니 우연인 것 같고, 한때는 운명이 아니길 바랐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적과의 동침’ 영화를 찍으며, ‘사랑과 ‘전쟁’과 평화’의 시트콤을 연출하며 살았다.
그의 직장 발령을 따라, 지방의 소도시 중의 극 소도시인, 어정쩡한 농촌 속의 번화가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자연을 벗 삼다가 자연의 냉혹한 추위와 변함없음에 배신당하고 실망하기를 수차례. 답답한 마음에 초등학교 사서 자리에 지원했다. 워낙 사람이 없었던지, 문헌정보학과 전공도 아닌 나를 뽑아주었다.
‘사서 인턴교사’
사서도 아니고, 교사도 아니고, 인턴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실력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사서나 교사가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암튼 그곳에서 난 최선을 다했다. 도서관 리모델링도 담당 교사와 도우미 어머니와 함께해냈고, 도서관의 업무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동안의 알바 내공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서 인턴교사’는 계약직이다. 계약서엔 그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업무보조’와 같은 것.
‘학교장이 지시하는 모든 업무’
이렇게 비합리적인 노예계약이 또 있을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에서도 방자, 향단이, 엉클 톰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안함이나 감사 없는’ 당연함은 있을 수 없다.
학교 행사 등, 모든 교사가 참여하는 것은 나도 당연히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교사들이 해야 할 것을, 나나 보조 교사들에게 떠맡기곤 했다.
“사서 선생님, 점심시간에 채점해야 합니다. 시간 비우세요.”
너무나 '당연한' 지시였다. 한 번은 해 줄 수 있지만, 두 번째는 하기 싫었다. 미안함이 없으니까.
“바쁜데요. 점심시간이 제일 바빠요. 아이들이 몰려오는 시간이라.”
“...........”
나에게 쏠리는 무표정과 침묵, 몰래 주고받는 눈빛.
처음 받아보는 불편한 침묵과 눈빛이었다. 이전에는 'NO!'라는 것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다음은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각오했으니까. 그 후로 여러 가지 제재나 간섭, 그런 것들이 이어졌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내가 그들의 요구를 물리쳤으니, 그런 것도 내가 견뎌야지.
다른 것들은 비교적 좋았다. 상냥한 오가는 미소, 개인과 개인이 만났을 때의 정겨운 대화, 가능한 상대방을 세워주려는 배려심. 그런 것들이 있어서 1년여간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한 것은 행복했다. 1, 2학년 아이들의 천진함과 창의성은 늘 놀라웠다.
“와! 이 책 무섭겠다.”
1학년 아이가 ‘피난 열차’라는 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 이 책 내용 알아?”
“네! 열차가 피가 났다잖아요. 진짜 무섭겠죠? 선생님.”
온풍기를 틀고 있던 나에게,
“선풍기는 후~ 하고. 온풍기는 하~ 해요.”
돌봄 교실에서 받은 피자를 먹지 않고 아껴서 가져다준 아이.
나를 그렸다며 그림과 사탕을 건네준 아이.
쉬는 시간마다, 수줍은 모습으로 혼자 와서 책장만 넘기다 가던 아이.
치마가 뒤집히는 것도 신경 안 쓰고 철퍼덕 앉아서 책 읽던 예쁜 눈동자의 아이.
알바를 하면서,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경우였다. 지금 그 아이들은 중·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었을 거다. 아니,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농촌이라서 편부모 가정이 많았고, 다문화 가정도 많았고, 조손 가정도 많았다. 그래서 정말 걱정되는 아이들도 있었고, 안쓰러운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은 멀리 떠나 왔지만, 살다가 혹시라도 그 아이들을 길에서 다시 마주친다면, 서로 눈길 피하지 않고 따스한 미소를 주고받는, 그런 상태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