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알바에서 만난 사람들.

사람은 '사람'으로 산다.

by silvery rain 이혜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사랑으로 산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사람은 ‘사람’으로 산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집안에서만 칩거하는 히키코모리도 완전히 혼자 동떨어져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SNS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한 것이고, 그들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고, 함께하는 삶을 동경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상처 주지 않을 사람과 세상으로 한정돼 있다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를 뿐이다. 그들은 상처 없는 삶을 동경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에 심취하는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캐릭터는 일관성이 있고 완벽하기 때문이다. 2D가 아닌, 사람은 언제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유도 함께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누군가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기만 해도 상처의 곪기가 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알바를 하면서 상처 받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행복했던 일들이 더 많았다.

깍듯하고 친절했던 사람들.

걱정을 담은 조심스러운 눈길.

마음에 위안을 주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몰래 챙겨주는 라면 한 그릇, 빵 한 조각.

부족한 실력을 책망하지 않고 감싸주던 배려. 그런 것들을 느낄 기회가 많았다.






한국은행에서 알게 된 K 언니가 있었다.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니던 언니였다. 언니는 늘 나를 동생 대하듯 돌봐 주었다. 밥이나 간식을 챙겨 주는 것은 기본이고, 좋은 장소도 데려가고, 영화도 보여주는 등 언니와 친구의 역할을 동시에 해 주었다. 그 언니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던 것이 너무 많다.

한 번은 언니가 은행에서 학습지원금이 나왔다며 나를 프랑스어 학원에 등록해 준 것이다. 자신은 시간이 없으니 대신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원금은 일부였고, 언니가 사비를 들여 나를 학원에 보내준 것이다. 그것도 석 달 동안. 난 그것도 모르고 알바와 학교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학원에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뿐만 아니라 난 K 언니의 친절과 배려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K 언니의 결혼식에도 학교 행사를 핑계로 불참했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 후로도 언니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했고, 진심 어린 말과 편지로 마음을 다독여 주곤 했다.

밥 먹었어? 배고프지? 힘들어도 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언니는 네가 참 기특해. 넌 내 친동생 같아.

지금도 K 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K 언니 역시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끊어버린 인연이다. 나의 가장 나쁜 점이다. 아주 힘든 일이 있을 때, 사람과의 연을 끊어버린다는 것. 그것도 좋아했던 사람과의 연을 제일 먼저 끊는다는 것.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자존심 상해서. 인생에, 세상에 화가 나서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연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잃는 것은, 그 사람과의 추억이나 기억을 잃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로망, 유토피아를 잃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끊어내면서 내가 살던,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던 아름다운 세상도 하나씩 끝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안 늦었다. 삶에 늦는 것은 없다. 우리는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 속에서 살고 싶은 삶을 창조하면 되는 것이다.


사는 것은 내공을 쌓아가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방황했어도, 방황한 만큼, 무의미한 시간이 쌓인 만큼, 나는 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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