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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Jun 25. 2024

소리와 듣기

이어폰과 헤드폰이 블루투스 기능을 장착하고서부터일까, 내가 지나는 이곳과 저곳에서 그 음향기기들을 더 빈번히 발견하게 된 때는. 심지어 음악이 흘러나오는 갖가지 실내 매장에서도, 심지어 잘 들어야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곳에서도 고가의 귀마개는 어김없이 발견된다. 여러 종류의 소음을 차단하고 자신이 선택한 소리만 듣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선택이라는 것도 기실 알고리즘이 가려준 것 중에서 고르는 무비판적 무반성적 행위일 뿐이다.) 눈만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귀 또한 디지털 기기가 내보내는 소리에 꽂혀 있다. 한발 물러서서 그런 사람들의 그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고립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저마다 다른 외딴 섬 같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의 군상화群像畫, 어쩌면 자화상. 


롤랑 바르트는 독자를 단순히 읽는 자로 설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가와 동등한 위치의 생산자이자 해석자로 보았다. 이러한 독자들이 읽는 행위를 ‘쓰여지는 읽기’라 부른다. 작가의 창작 없이는 독자의 해석도 없지만, 읽는 눈의 해석 없이는, 더 근원적으로 읽는 눈 그 자체 없이는 쓰는 손의 생산은 의미를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쓰여지는 읽기는 읽혀지는 쓰기로 치환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말하기와 듣기 또한 마찬가지의 관계다. 듣는 귀가 있어야 말하는 입에 존재감이 실리고, 발화가 있어야 청취가 가능해진다. 말해야 들을 수 있다는 시간상의 순서가 있고, 들어야 말할 수 있다는 의미상의 순서가 있다. 말하기와 듣기도 쓰기와 읽기처럼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어쩌면 굳이 바르트의 탁월한 혜안을 들먹이지 않아도 될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한 글자만 다시금 살펴본다면 말이다. 소리 성聲. 들을 청聽이면 모를까 소리 성聲의 부수가 귀 이耳라는 게 심상치 않다. 이 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갑골문에는 입 구口가 있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귀 이耳만 남아 지금의 모양이 된 소리 성聲. 옛 사람들은 소리라는 것이 입을 통해 나오는 것보다는 귀를 통해 듣는 것이 더 중하다고 받아들였을 테다. 의미상 더 먼저 온다고 헤아렸을 테다. 이 글자를 보면서 듣는 일의 가치를 되새겼을 테다. 말하고자 하면 먼저 들어주어라.  


읽히지 않은 텍스트는 텍스트가 아니듯이 들리지 않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소리라는 물리적 사건이 이 세계에서 하나의 의미가 되려면 듣기라는 물리적이고도 심정적인 행위가 있어야 한다. 듣는 귀가 없다면,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소리는 무의미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예 존재한 적 없는 사건이 되고 만다. 듣지 않은 소리, 들리지 않은 부름(부를 빙聘)이란 읽히지 않는, 다양한 해석을 낳지 못하는 텍스트와 같다. 죽은 것이다. 그러하니 듣기는 소리가 무의미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무의미라는 죽음의 장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행위이다. 


귓구멍을 막고 있는, 귀를 덮고 있는 마개를 벗어보자. 그러면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가 들린다.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 또한 뭇 존재들과 더불어 이 세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니 그 소리 또한 내가 낸 소리일 테다. 그 소리를 듣는 것은 내 자신의 목소리를, 부름calling을 듣는 것이니 듣기란 나 자신을 의미의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소명에 화답하는 일이다. 구원은 내가 귀 기울여 듣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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