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379~382
진정한 단절은 우리가 더 이상 그쪽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단절이 과거가 존재하기를 그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절 속에서 과거의 물질은 휘발된다... 나의 영토는 잡히지 않는 곳에 있다... 내 영토가 상상적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항상 새로운 영토에 길을 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Une vraie rupture est quelque chose sur quoi on ne peut pas revenir, qui est irrémissible parce qu'elle fait que le passé a cessé d'exister... voilà que, dans la rupture, non seulement, la matière du passé s'est volatilisée, mais... mes territoires sont hors de prise, et pas parce qu'ils sont imaginaires, au contraire : parce que je suis en train de les tracer.
절단(la coupure)과 단절(la rupture). 우리말로 번역해서 써버리면 그저 글자 순서만 바뀐 똑같은 말인 듯싶으나, 들뢰즈-가타리의 책에서 이 둘은 거의 서로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절단은, 큰 것이나 긴 것을 더 작고 좁게 만든다. 예컨대, 기표작용은 의미를 만드는 동시에 한 사물을 다양체적 삶으로부터 '절단'해 낸다. 누군가 '엄마'라고 불리면, 그때 불리지 않은 다른 삶은 잊히거나 억압되거나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단절(la rupture)은 계속되는 것, 습관적으로 하던 행위를 멈추면서 끊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관성'이 워낙 세기 때문에 계속해오던 걸 그만하는 일은 실상 쉽지 않다. 독한 결심이나 우연한 결정적 계기가 필요한데, 그렇게 무언가를 '안 하겠다고' 결심했더라도 되돌아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진정한 단절은 실상 계속 다른 일을 행하면서-해내면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부단히 연습해서 어느 날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면, 더 이상 자전거를 못 타는 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생동하는 몸체만이 진정한 단절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