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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자리로 돌아갈 뿐

B-8. 1249 번외 | 관계는 넓히는 것이 아니라, 정제되는 것이다

by 일이사구

퇴사 후 가장 먼저 달라지는 건 시간이 아니다.


관계다.


출근하지 않는 첫 월요일 아침,

습관처럼 메신저를 열었다가 멈춘 적이 있다.


어제까지 이어지던 채팅방은 조용했고,

늘 누르던 이름 위에 손가락이 멈췄다.


“지금 연락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 순간 알았다.

퇴사는 일정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관계의 전제가 사라지는 일이라는 걸.


처음엔 조금 서운했다.

조금은 내가 밀려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조의 문제였다.


회사라는 무대가 사라지자,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친했던 게 아니라,

같은 장면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어두고 싶다.


퇴사는 관계를 잃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가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사건이다.


사라지는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퇴사 후 관계는

갑자기 끊어지는 게 아니라,

층층이 정리된다.


1) 역할 기반 관계

업무로 연결된 관계.

보고서, 일정, 회의로 이어진 관계.


회사라는 무대가 사라지면

가장 먼저 내려간다.


2) 상황 기반 관계

커피 머신 앞의 잡담,

같은 상사를 두고 생긴 연대감,

프로젝트 막바지의 동지애.


상황이 끝나면 이 관계도 조용히 막을 내린다.


3) 사람 기반 관계

역할도, 상황도 사라진 뒤에도

남는 극소수의 관계.


이 구조는 차갑지만,

관계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는 관계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넓히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됐다.


많을수록 피곤했고,

넓을수록 관리가 필요했다.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나게 두는 것.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퇴사 후 관계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정제되는 것’이다

관계는 숫자가 아니다.

질감이다.


퇴사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많은 ‘역할 기반 관계’ 속에서 살았는지 보였다.


어떤 관계는 상황이 끝나자 사라졌고,

어떤 관계는 설명 없이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건 상실이 아니라,

무게 재정렬이다.


무대를 떠나면

남는 건 연극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는 자리

관계가 정리되고 나면

가장 깊은 자리 하나가 드러난다.


아주 조용하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리.


바로 삶의 기반이다.


회사 사람들은 사라지고,

상황 기반의 동료들은 멀어지고,

역할 기반 관계는 흔적 없이 지워져도,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아내였다.


어디를 가든 함께 걸었고,

부족한 순간마다

나보다 먼저 나를 믿어준 사람.


퇴사 후 수입이 끊겼을 때도,

방향을 잃고 맴돌던 시간에도,

내 옆에는 늘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건 인맥이 아니다.

의리도 아니다.


삶을 함께 운영하는 관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짜 소중한 관계는

동료도, 네트워크도, 인맥도 아니다.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게 가족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이쯤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괜찮다.

그 말은 실패가 아니다.


관계의 최종 순위에서

1순위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그 어떤 무대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변화에도 휘청이지 않는 사람.


바로 나다.


모든 관계가 떨어져 나가도

끝까지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관계.


삶의 마지막 안전장치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이끄는 설계자.


관계의 끝에서 남는 것

퇴사 후 관계는 재난이 아니다.

정제다.


삶의 다음 무대에는

모든 사람을 데려갈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 사람이 가족이라면 축복이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면

더 큰 가능성이다.


기록은 나중이다.

지금은,


내 곁에 남아 있는 관계로

오늘을 살아내는 게 먼저다.


모든 재설계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1부 | 1249 커리어 실험의 기록-1부, 흔들림에서 설계로

https://brunch.co.kr/brunchbook/1249-career-log

2부 | 1249 커리어 실험의 기록–2부 (NEX), 다시 실험을 이어가다

https://brunch.co.kr/brunchbook/1249-career-n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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