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 에필로그 | 커리어의 규칙을 내려놓고, 삶을 다시 설계하다
퇴사 이후, 길이 안 보인다는 감각이 찾아왔다.
커리어를 오래 쌓아왔는데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불안이었다.
그때 나는,
이 문제를 ‘버텨야 할 상황’이 아니라
다시 설계해야 할 삶의 구조로 보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삶의 플레이어였다.
규칙은 이미 주어져 있었고,
평가는 타인의 손에 있었으며,
정답은 언제나 어딘가 바깥에 있다고 믿었다.
회사는 하나의 게임판이었고,
나는 그 안의 캐릭터처럼 움직였다.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고,
다음 레벨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퇴사 이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가 규칙을 정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의외로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공백.
하지만 시간을 두고 돌아보니
그 감정의 정체는 조금 달랐다.
그건 끝이 아니라,
설계가 시작되는 순간의 공백이었다.
플레이어로 살 때 우리는
정답을 맞히는 데 익숙해진다.
정해진 계획,
정해진 평가,
정해진 구조.
회사에서의 커리어는
미리 설계된 던전을 통과하는 일에 가깝다.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길을 ‘찾아야 한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
우리는 방향을 잃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방향 상실이 아니라
자기 서사가 잠시 멈춘 상태였다는 것을.
길은 원래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앞은 늘 비어 있고,
길은 지나온 흔적이
뒤에서 설명되는 구조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삶은 찾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삶은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손에 쥔 조각들로
지금 가능한 형태를 조립해 보는 일에 가깝다.
경험과 감정,
상황과 선택.
이 조각들은
정답을 향해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을 만들어낸다.
디자이너는 길을 찾지 않는다.
선택이 길이 되도록 만든다.
플레이어 시절 나는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실패의 신호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감정은 방해물이 아니라
다음 방향의 실마리가 되는 신호라는 것을.
불안은
멈춰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권태는
성장이 멈췄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소진은
구조 자체가 틀렸다는 경고다.
디자이너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
감정을 수집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다.
감정은
설계의 나침반이다.
플레이어는 정답을 찾고,
디자이너는
실험으로 다음 공간을 연다.
작은 분기점.
작은 실행.
작은 리듬의 변화.
돌이켜보면
내 삶 역시
그런 선택들의 연속이었다.
그때는 계획이 아니었고,
전략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 가능한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걸음들이
하나의 방향이었음을 이해했다.
이제야 분명해졌다.
나는 더 이상
주어진 규칙을 수행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이제는
나의 기준을 설계하는 사람,
즉 디자이너로 살아가야 한다.
길이 없어서 불안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설계하지 않았기에
비어 보였을 뿐이다.
앞이 비어 있어도 괜찮다.
그 공백에서
다음 구조는 시작된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안다.
길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남긴 흔적이
뒤에서 길이 된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누군가 설계한 삶의 판 위를 걸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길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간 내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나는 뒤돌아서야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삶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내 안의 오래된 두려움과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을 끌어안고,
나는 내 삶의 다음 페이지를
스스로 설계하고 그려나갈 것이다.
앞이 비어 있어도 괜찮다.
길은 늘 그 공백에서 시작된다.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일,
멈추지 않고 나를 다시 조립하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만든다.
완성보다 진화.
그 과정이 곧 나의 실험이자, 나의 커리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