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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삶이 담겨 있기에 영화를 본다

by 김밥


삶이 담겨 있기에 영화를 본다


프롤로그에서 이런 방정식을 세웠다. 영화 + 사람 + 거리 = 추억. 영화와 사람과 거리를 더해서 추억이 만들어져 왔노라고 주절거리며 시작했는데. 과연 그랬던 것일까?


거리는 변하고 사람은 떠난다지만 영화는 그대로 아닌가. 외관상은 그대로가 맞다. 그렇지만 세월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거리도 사람도 영화도 상수(常數)라고 할 수 없으니, 추억의 값은 어떻게든 변하는 것인가? 추억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인데 그 모양이 항상 그대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일까? 저 추억의 방정식이 옳다고 가정하면, ‘영화’라는 답이 나오게 된다. 사람과 거리라는 변수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는 변수는 오로지 하나, 영화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삶을 곱게 꾸미는데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고집을 부리기 위한 억지 방정식이었다.




그 시절의 영화 관람기를 쓰려다 보면, 그때의 느낌이 제법 그럴듯하게 되살아날 때도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언제 것이라도. 기억은 생생한 것도 있고 흐릿한 것도 있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기억이 똑똑하게 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절의 그 감정이 되살아나기는 어렵다. 그때의 그 감정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떠올려지는 무엇이다.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듯만 해도 깜짝 놀랄 만큼 그 시절과 닿아 있음을 느낀다.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타임슬립이다. 그렇게 만져지는 그 시절의 느낌 다음에는 지진에 이어지는 여진처럼 가슴 저림이 따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불러낼 수만 있다면 자꾸 불러내고 싶은데 그것은 쉽지 않다. 곁에 두고 만질 수 있는 베갯잇이나 꺼내볼 수 있는 사진첩보다 더 가까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그것은 아주 가늘고 긴 현(絃)으로 만들어진, 내 속에 숨어있는 악기 같은 무엇이다. 때로는 사진 한 장으로, 때로는 멜로디 한 소절로, 때로는 단어 한 개로도 고유의 진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아주 짧고 약한 진동이라서 근근이 느껴질 정도의 울림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더 큰 여진이 따라와서 깊은 곳에 잠재워둔 아픔을 깨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울림은 지금은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때에만 느낄 수 있었던 고유의 것이기에 여진이 동반되더라도 느끼고 싶을 때가 많다. 영화는 기꺼이 추억 소환 촉진제 역할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여건이 갖추어진 순간이 확 다가올 때면, 내 안의 현악기를 연주하여 추억의 진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영화가 해내더라는 것이다. 그럴 때 순식간이지만 '내 마음의 타임슬립'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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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라는 말이 있다. 삶에 조언을 얻었던 영화를 그렇게 불러왔다. 그런 영화들은 추억을 불러내는데 특별한 재주를 가진 영화이기도 해서 내 마음의 악기를 자주 연주한다. 그 영화들은 마음을 흔들었던 장면 장면마다 주소라도 찾아가듯 고유의 진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영화 자체가 추억으로 자리매김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때로는「내 인생의 영화」가 마음의 울림 종합선물 세트 역할을 해준다. 술에 취하면 집에 와서「내 인생의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술 취해서 정신을 날려 먹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보았겠는가. 그것은 보고 듣고 생각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냥 곁에 있어만 줘도 좋은 느낌의 영화. 변함없는 모습으로 다가와서 처음 만난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의 모습으로 다가와주기에 나 역시 그런 감정으로 다가가고 싶은 영화. 그것이 「내 인생의 영화」다.


“영화를 찾아서 추억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애써 추억의 언저리를 살피다 보니 멈칫한 구석이 있었다. 영화를 본 세월이 제법 되는데도 나를 다독거리며 나를 위로했던 「내 인생의 영화」들은 어린 시절 즉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사이에 봤던 영화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으로 들어오기가 쉬웠던 시절이라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참으로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영화를 더 많이 보기 위해서 성인이 되기를 바랐던 기억이 나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본 영화가 오히려 「내 인생의 영화」가 되기 힘들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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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영화가 있었으니 ‘내 인생의 영화’라는 말이 성립된다. 바꾸어서 영화 속에 삶이 있었으니,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것이 곧 삶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영화 속에는 가지각색의 삶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내 인생의 영화」에는 내 삶의 기준이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들의 그런 삶에 고개를 끄덕이며 보았으니까. 그렇게 살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런 삶에 공감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되어 준 것이 바로 「내 인생의 영화」였다.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흘러간 영화도 보고, 최신 영화도 본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울림이 있는 영화들을 발견한다. 언젠가부터는 「내 인생의 영화」가 쉽게 더해지지는 않지만 그것은 영화 탓이 아니라 내 마음에 여백이 좁아진 탓이다.


그 속에 삶이 담겨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면,「내 인생의 영화」도 없었을 것이다. 항상 영화에 감사하며 산다. 영화(榮華)로운 삶이 아니라 영화(映畫)로운 삶에 감사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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