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매치였던 쿼츠 혁명
1960년은 블로바의 어큐트론이 등장하여 모든 기계식 시계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드는 최첨단 전자시계가 처음 등장한 시기였다. 블로바는 적당히 기술을 공개하거나 라이선스를 주어 에큐트론을 시계의 대세로 만들어야 했지만 욕심이 과했다. 그래서 단물을 다 빨아먹은 1968년에야 스위스에 라이선스를 주어 어큐트론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 대가로 1년 후인 1969년에 블로바를 멸망시킬 쿼츠 시계가 등장하는 것이다. 쿼츠 혁명은 디자인 경쟁하고는 차원이 다른 'To be or not to be'(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의 전쟁이었다. 햄릿처럼 한가하게 고민할 틈도 없이 제품을 기획했다가 실패하면 곧장 죽어 나가는 '호러의 역사'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어큐트론이 등장한 1960년에 '사이코'를 발표한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히치콕은 스위스 시계 회사들에 대한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블로바의 특허권 때문에 어큐트론 기술을 개발할 수 없었던 Seiko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의 계측을 위해 개발된 탁상시계를 소형화해서 어큐트론을 박살내기로 결정한다. 그 후 5년간의 노력 끝에 탁상용 시계를 손목시계 사이즈로 소형화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63년부터 사정사정했던 라인센스를 거부했던 어큐트론 때문에 열받은 스위스의 25개 브랜드도 연합하여 베타 21을 개발하게 된다. 그러나 1969년 12월 25일 쿼츠 시계를 제일 먼저 발표한 회사는 세이코였다. 세계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 아스트론(Astron)이다. 1969년 이후 시계 역사의 주인공은 20년간 세이코였다. 스위스 입장에서는 일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로맨스 드라마였다면 좋았겠지만 세이코가 연출한 드라마는 '디어 헌터'의 러시안 룰렛이었다.
세이코는 혼자서 쿼츠 손목시계를 만들었지만, 스위스는 25개 브랜드에서 투자를 받아 CEH라는 연구소를 만들어 쿼츠 손목시계를 개발했다. 세이코 vs 스위스 연합의 전쟁이었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전쟁 같지만 1980년대에 이상한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세이코가 다 이긴 전쟁이었다. 2차 대전과 달리 연합 브랜드에 희망이라곤 안 보이는 전쟁이었다. 1980년 초 스위스 브랜드들을 아우슈비츠에 몰아넣고 독가스만 주입하면 시계 브랜드는 '세이코' 하나만 남을 상황이었다. 아직 희망이 보이던 1969년 스위스 연합도 세이코와 같은 1969년에 스위스 최초의 쿼츠 무브먼트인 '베타 21'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개발에 투자한 25개 브랜드 중 롤렉스,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IWC 등 16개의 브랜드에서 나누어 구입하여 1970년 바젤 페어에서 스위스 최초의 쿼츠 시계들을 발표하게 된다. '베타 21'이 6,000 개 제조되었음에 비해 일본의 아스트론은 100개만 제조되어 도요타의 코롤라 자동차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2001년에 등장한 '리샤르 밀(Richard Mille)'은 포르셰나 페라리의 스포츠카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21세기에 가장 성공한 브랜드이다. 1억 원 정도의 시계가 엔트리(입장권) 모델이다.
1970년 해밀턴은 미국에서 개발된 LED 기술을 사용하여 첫 쿼츠 디지털시계인 'Pulsar'를 TV쇼에서 발표한다. 겉모습은 심플하지만 무브먼트는 당시로서는 전자 컴플리케이션의 끝판왕이었다. 1970년 유명한 자니 카슨 쇼에 프로토 타입을 가지고 출연하여 '손목 컴퓨터(Wrist Computer)'라고 소개하게 된다. 1957년 전기 시계를 서둘러 발표했던 블로바는 이번에도 너무 서두른 탓에 숫자 4개를 표시하기 위해 44개의 칩과 4,000개의 본딩이 필요한 진짜 컴퓨터 수준의 시계를 만든 것이다. 전기 시계만큼 악명이 높아서 RCA의 기술자가 칩 하나에 그 모든 기능을 통합하고서야 쓸만한 시계가 되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판매한 것은 1972년이었다. 당시 2,100달러의 시계였다. 현재로 환산하면 대략 12,000 달러이다. 2년 후 세이코는 6개의 숫자를 표시하는 LCD 시계를 개발하여 해밀턴을 포커판에서 쫒아내게 된다.
1972년에는 쿼츠 시계가 등장하면서 반도체 칩 때문에 기술 개발의 중심지가 된 미국에서 그루엔을 시작으로 여러 브랜드에서 LED와 LCD 시계들이 등장한다. 호러 영화의 시작은 1974년 일본 Casio의 '카시오트론'이라는 LCD 시계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7년에는 Timex에서 LED와 LCD 시계가 등장했다. 카시오는 당시 '이게 뭐지?'하고 헷갈릴만한 신생 브랜드였지만, 타이멕스는 1945년 이후 이미지가 확실한 브랜드였다.
'우리보다 비싼 가격으로 시계 못 팔아!'
타이멕스는 시계 브랜드들의 단두대였다. 타이멕스가 만들면 그 기술은 더 이상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다이소 제품'인 것이다. 전기 시계에 이어 디지털 시계 개발에서 실패한 해밀턴은 갈 곳이 없었다. 러시안 룰렛의 치명적인 탄환이 발사된 것이다. 해밀턴은 스와치 그룹의 전신인 ASUAG에 인수되어 스와치 그룹에서 티솟 밑의 최하위 브랜드로 남게 되었다. 쿼츠 혁명이 그 정도로 살벌한 게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샘플이다. 해밀턴은 1892년 창업 이후 롤렉스나 오메가처럼 미국에서 최고급 시계를 만드는 미국 최고의 하이엔드 브랜드였다. 현재는 1970년대 베트남 전쟁 시 미국의 육군에 공급했던 한 번 쓰고 버리는 시계(disposable watch)가 대표 모델이다. 미군 군복을 상징하는 '카키(Khaki)'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