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감정은 메마르고...
by for healing Aug 5. 2024
'세상에! 저 지지배~ 지 아빠가 얼마나 지를 이뻐했는데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네'
'어머! 쟤좀 봐! 쟤 진짜 독하네'
'딸자식 다 소용없다더니 맞네, 맞아'
'언니, 쟤 왜 저래? 어쩜 저렇게 못됐어, 지 아빠 죽었는데?'
엄마는 8남매, 그중 말 많고 정 많고 웃음 많은 다섯 자매 중에 맏이이다. 모든 대소사에 자신들이 없으면 큰일 나는 양 나서는 독수리 오 형제, 아니 오자매들이다. 상대적으로 삼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들이 별로 없는 데다가 성격들이 온화하여 조용하지만 위에 쓴 바와 같이 이모들은 이북 출신 피를 받아서 그런지 드세기 짝이 없고 모든 상황을, 심지어 슬픈 상황조차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주는 심지어 개그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모들이 모이면 언제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 태도는 좀 심하다 싶었나 보다.
하긴 엄마가 이모들에게 아빠의 외도사실을 이야기했을 리 없었을 테고, 이모들 눈에는 그저 가난했던 시절 자신의 집안에 구세주처럼 나타나 예쁜 언니를 백마에 태워 데려간 멋진 의사 왕자, 형부였고
그 이후로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사모님 소리 들으며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언니가 내심 부럽고 한편으로는 질투가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언젠가 명절에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질투 많던 셋째 이모가 엄마에게
"언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런 복을 꿰차고 살까? 언니가 많이 배우길 했어? 뭐 그리 대단한 직장을 다니길 했어?"
취중진담, 이런 게 바로 그것이었다. 여자 형제 사이에서는 당연히 그런 질투 어린 시선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난 슬프지 않았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 나는 슬프지 않았다. 눈물이 안 나오는 걸 어떻게 해?
문득 오빠를 보았다. 상주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우는지 아닌 지 잘 보이질 않는다.
엄마를 돌아다보았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걸 보니 울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멀뚱이 앉아서 딸아이 머리를 묶어 주고 있는데 남편이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온다.
'해파리 같은 사람' ㅎㅎ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얼굴에 한가득 씌어있다.
" 아무 말도 하지 마, 듣기 싫어"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버님이 잘했다고 편드는 게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정말 아버님이 잘못한 건 맞는데.. 백번 잘못했는데... 한번 생각을 해봐, 그 큰 병원에서 돈은 많지, 시간도 많지, 그런데 혼자 계셔, 그런데 신앙이 있다면 몰라도... 아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아버지는 너무 외로웠잖아, 남자들은 그래, 남자들이라는 원래 그렇다니까 본능적으로... 그걸 좀..."
"본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엄마도 외로웠어"
"엄마한테는 오빠하고 당신이 있었잖아"
"..... 남의 아버지라고 쉽게 얘기하지 마, 당신 아버지였어도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겠어?"
" 용서하라는 게 아니야, 당신 마음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야. 당신 지금 너무 무섭고 낯설어... 알아? 내가 아는 당신은 진짜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 사람인데.. 완전 다른 사람 같아서..."
누구를 미워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알아?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래? 당신 스스로 후회할 일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얘기 하나 더 해 줄까? 아빠 병원에 있을 때 나, 아빠 빨리 데려가라고, 아빠 빨리 죽으라고 하나님한테 기도했어. 그랬더니 그 기도는 들어주시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너무 했다 싶었던 거지. 죽어 마땅하다 싶었던 거야. 병원에 그 꼬락서니로 누워있으면서도 엄마한테 성질부리는 거 봤지? 엄마가 겨우 틈이 나서 식사하니까 '니가 뭐 한 게 있다고 밥을 처먹냐?'며..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도망가지 않고 속알머리 없이 병시중 들고 있는 엄마한테, 재산도 다 날려먹은 바람둥이 주제에, 뭘 잘했다고...
그래도 죽기 전에 한마디는 했었어야지,
'미안하다''아빠가 잘못했다'라고!!!!...
그러니까 당신도 바람피우려면 나한테 들키지만 않게 해. 나만 모르게 하면 다 봐줄 테니까 "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내뱉었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듣고 계시던 하나님도 깜짝 놀라셨겠다.
'얘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 그런 하나님이 아니란다 그런 기도에 응답하는... 쩝...'
일단 하나님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런 기도를 한 건 사실이었다.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는 아빠가 너무너무 꼴 보기 싫었다. 뇌에 문제가 있는 환자는 가까운 식구들을 함부로 대한다며 의사 선생님께서 엄마에게 간병인을 쓰시고 면회 형식으로 오시라고 권하셨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믿음 좋은 남편은 내 이야기에 충격이 컸나 보다. 충격받으라지, 악에 바친 내가 못할 말이 어디 있어 지금...
그런데 저 사람은 사람이 열받아 있을 때 항상 차분하다. 그리고 옳은 말을 해서 더 화가 날 때도 있다. 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얘기하곤 했다. '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효자가 되었다'라고ᆢ
그리고 내가 이렇게 눈이 돌아갔을 때에는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저 사람은..
"알았으니까 손님들 뜸할 때 좀 쉬어"
더는 할 말이 없는지, 더 이상 건드리면 물리겠다고 생각했는지 잔뜩 독이 올라 있는 나를 뒤로하고 남편은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아~짜증 나!!
그런데 생전에 뭔 덕을 쌓았는지 문상객이 줄지를 않는다.